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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 끝이 아닌 완성으로 바라보며 』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전도서 7장 2절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잔치 집에는 즐기러 가지만 초상집에는 위로하러 갑니다. 옛날에는 음식이 귀했기 때문에 잔치 집에 가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즐거운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음식이 흔하기 때문에 잔치 집에 가는 즐거움이 옛날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초상집에 가서 느끼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초상집에 가면 유족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호상(好喪)의 경우라 할지라도 위로가 필요하고, 젊은 사람이 배우자나 자녀를 남겨 두고 질병이나 사고로 죽는 흉사는 남아 있는 가족에게 너무나 큰 절망과 슬픔을 주기 때문에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될 것입니다. 어리거나 젊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악상(惡喪)이나 변상(變喪)의 경우, 부모는 참척(慘慽)의 고통 속에 위로 자체까지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을 당한 지인을 문상을 할 때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입 안의 말로 우물우물 할 경우도 많습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오늘날도 사람은 다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늙어서 죽기도 하고 젊어서 죽기도 하고 또는 어려서 죽기도 하고 태어나서 곧 죽기도 합니다. 어떻게 죽든 사람이 죽으면 그 집은 초상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까운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기도 하고, 가족이 암으로 죽기도 합니다. 원인을 발견하기 전에 갑자기 죽기도 하고, 천재지변으로 죽기도 합니다. 흔히 죽는 데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만 바른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떻게 죽든 그것이 순서입니다. 다만 전도서 기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맞을 때는 당황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한 교훈을 전도서 7장 4절에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종말은 세상 끝을 뜻합니다. 그런데 종말에는 두 가지 의미의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죽음인 개인적인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종말입니다.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용어에서 끝이라는 의미만을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종말은 궁극적인 목적을 의식하여 사는 것과 그 완성을 이야기 합니다. 특히 신학에서 ‘종말론적’이라는 용어를 그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살아 있는 자는 누구든지 ‘이 죽음을 그의 마음에 둘지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부연하여 설명하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는데 그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감각에 있어서 가장 심오한 윤리적 중요성을 지닌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속적 측면인데,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의 백성에게는 해방을, 적에게는 심판을 행하셨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와 순종의 반응으로 살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삶에 윤리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둘째는 종말론적 측면으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는 하나님의 지속적 목적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악을 제하시고 의를 옹호하시며, 정의와 평화를 확립하시고, 하나님과 인류와 자연 간의 조화를 회복하심으로서 당신의 목적을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의 역사적 감각으로 인하여 그들의‘현재’는 윤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즉 내가 지금 여기에서 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과 그분이 미래에 하실 일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과거에 그 크고, 중요하고, 놀라운 일을 많이 행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태도는 마땅히 감사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들과 마지막 ‘그 날’을 기다리며 그의 나라를 세우도록 힘쓰고, 그의 나라 법에 통치를 받으며, 의로운 사람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시편 1편은 그 같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속적 역사와 앞으로 이루어 가실 종말론적 계획이 잘 조화된 역사 이해에서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두 측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면 운명론이나 숙명론이 될 위험도 없어집니다. 요셉이나 다윗은 이 둘에 대한 잘 조화된 가치관과 태도로 살면서 좌절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동하지 않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여도 실제적인 삶의 문제가 모두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신앙이 깊어질수록 그 이전에는 쉽게 지나갈 수 있었던 문제들이 더 심각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옛날에는 돈 버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갈등을 느낄 수도 있고, 옛날에는 남에게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삶을 자신이 올곧게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당혹스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목사인 나에게도 자주 일어납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분량은커녕 최소한의 인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도 많습니다.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형편이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계에 부닥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런 시행착오의 과정은 모든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겪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라고 했던 것이 바로 종말론적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싸움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화해, 용서, 평화... 이런 말이 좋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악이 존재하고 사탄이 역사하는 한 화해나 용서나 평화 같은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장군 베게티우스는 그의 “군사학 논고”라는 책에서“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였는데, 이 책은 오늘날까지 군사학자들의 고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평화는 악과 사탄과의 싸움에서 쟁취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평화는 전적으로 신자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상에서 쟁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보면 not yet, 아직 입니다. 모든 신자는 구속과 종말의 어간을 살아가기 때문에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한 것을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 삶에 대한 교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데 거기에 무슨 싸울 일이 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믿음의 싸움은 다른 사람과 싸우라거나 다른 사람과 경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이 믿음의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바울은 신자가 믿음의 싸움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언뜻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립니다. 믿음이 선물이고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것인데 믿음의 싸움을 통해 얻는다는 말이 이상합니다. 

믿음이 왜 싸움인지 굳이 설명하자면 믿음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라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싸움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곧 믿음이 과정이라는 측면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과정이며 우리의 믿음도 역시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성실하게 거쳐야만 우리의 믿음은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인생을 과정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처럼 믿음도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개는 그냥 한 순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렇게 한 순간에 충실하다보면 그게 과정이 되긴 하지만, 전체를 과정으로 인식하는 믿음생활과 그렇지 않은 믿음생활은 크게 다릅니다. 믿음을 실제적인 삶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믿음의 싸움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고 종말론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싸움이라는 말은 믿음이 자라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자라야만 합니다. 믿음은 씨앗이나 모종과 같아서 물을 주고 햇볕을 받게 해야만 자라납니다. 생명의 속성은 자라는 것이고 자라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죽을 때가지 자라야만 합니다.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바울은 믿음의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자란다고 했을 때 지향하는 것은 “완성”의 때입니다. 그 때가 바로 역사적 종말인 주님의 재림 때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매달렸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거기에 신앙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이 곧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이 완성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참된 생명의 완성이고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들도 주님 재림 때 그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너무나 부분적이며, 너무나 순간적이라서 전체적으로, 총체적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의 태아가 어머니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희미하고 아득하고 불완전합니다. 태아가 살아있기는 하지만 이 세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심장소리와 위장 운동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노래하며 그 노래 소리도 들을 것입니다. 누군가 피아노를 치면 그 소리도 희미하게나마 들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차나 커피를 마시면 그 향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것처럼 태아의 세상 경험은 희미할 뿐입니다. 하지만 태아가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희미하던 모든 것은 밝아지고 간접적이던 모든 경험이 직접적인 경험이 됩니다. 이것은 예에 불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이 완성될 그날은 가슴 설레는 기다림이고 희망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인 종말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명과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황상하  joseph195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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