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순교>의 주인공 '아, 김영학 목사’

필자의 <나의 블라디보스토크 순례기(3)> ‘아, 김영학목사’의 본 기사는 최양섭목사(기감, 대죽교회 담임, 김영학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연구자료를 토대로 정리하였음을 미리 밝힌다. 최양섭목사는 잊힐 뻔한 김영학목사의 일대기를 발굴하기 위해 김영학목사의 유족을 수소문 끝에 찾아 만나 생생한 증언을 얻어내고, 그분의 블라디보스토크 선교지를 수 없이 왕래하며 역사적인 현장들을 밝혀냈으며, 더 나아가 김영학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순교’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한국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온보다 10도 이상은 차이가 날 거라고 생각하며 준비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의 칠월은 대한민국의 칠월만큼 더웠다. 약간의 기온의 차이는 있었지만 하늘이 더 맑은 탓인지, 햇살은 더욱 따가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흥단의 여정은 항일 독립투쟁의 발자취와 러시아 정교회를 탐방하는 일정을 지나 그토록 사모하던 고(故) 김영학 목사의 삶에 모아졌다.

독립운동가, 기독교대한감리회 해외파송 최초 순교자 김영학 목사 (최양섭 목사 사진 제공)

사실 우리를 안내하던 C선교사는 김영학목사의 후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가 지난해 7월 발효한 신종교법에 의해 모든 개신교 활동을 금하고 교회로 지어진 건물 외에는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이 일로 많은 선교단체 및 선교사들이 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하지만 C선교사는 약 100여 년 전 김영학목사의 블라디보스토크 선교지 및 선교 활동을 근거로 정식 교회로 인정을 받아 선교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영학목사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세운 교회는 지금은 아파트 촌에 덮였다. 하지만 김영학선교사의 정신은 더욱 오롯이 남아있다.

‘동방을 정복하라’는 이름의 뜻인 ‘블라디보스토크’. 그들의 적극적인 개척 정신보다 더 강한 것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사명 아닌가?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들에게는 유럽의 관문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유럽의 관문인 마케도니아로 이끄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는 유럽선교의 관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가이며 감리교 해외파송 최초 순교자인 김영학목사의 발자취를 발굴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선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광장의 래닌 동상 동쪽을 가리키며 '동방을 정복하라'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응답한 목사 김영학

1877년 2월 10일 황해도 금천군 조포리에서 만석꾼의 집안의 아들로 출생한 김영학은 어려서는 한자를 공부했고, 17세 이른 나이에 신학문을 배우며 세상 물정을 접하였다. 하지만 그가 접한 조국의 현실은 을사늑약과 한일합방 체결로 암울하기만 했다.

김영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반의 체통과 체면을 내던지고 기울어가는 조선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선양하는 노력을 하였으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미력한 한계를 체감하고 자포자기 듯 광인(狂人)이 되어 주색잡기와 난봉꾼의 세월을 보낸다.

1906년 토산장이 서는 날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살아보라”는 노방 전도대의 전도로 복음을 수용하고 복음의 능력으로 회심하고 1907년 세례를 받고, 1908년 권서인이 되어 성경과 찬송, 쪽복음, 전도지, 신앙서적을 가지고 지역을 순회하며 본격적인 전도인이 되었다.

1911년 15회 남감리교회 선교연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고, 1914년 제18회 선교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5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정회원에 허입(장로목사)하였다.

1909년-1910년 평산구역장. 1910년-1911년 금천구역장, 1911년-1914년 장단구역장, 1914년-1915년 철원구역장, 1915년-1917년 (서울)광희문교회 담임, 1917년-1918년 (서울)수표교교회 담임, 1918년 간선구역장으로 양양교회 부임하게 된다.

김영학 목사 아내 안원정 사모(최양섭 목사 사진 제공)

양양교회로 부임 후 김영학목사는 지역의 청년들을 모아 예수를 믿고 나라 사랑을 생활화하라는 훈련을 시키게 된다. 그 날에 김영학목사의 아내인 안원정사모는 다음처럼 증언한다.

“강원도 간성교구를 맡게 되어 그곳에서 지내던 중 많은 청장년들을 모아 주님 바로 믿고 나라사랑을 생활화하라는 말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했어요. 또 순회강연과 전도를 위해 바쁜 일정으로 집을 비울 때도 빈번했지요.”

김영학목사의 영향으로 양양지역의 젊은이들과 교인들은 투철한 신앙과 독립정신으로 무장되어 갔다. 김영학 목사는 구역장으로 양양교회에 주재하며 광정교회, 낙산교회, 물치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했다.

그러던 중 1919. 3. 3일 조영순장로의 딸 조화벽이 호수돈여고 졸업반으로 개성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양양에 오면서 버선목 솜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대포항을 통해 가져왔다. 개성의 만세운동에 관해 전해 들은 양양교회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4.4일 장날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며 양양공립보통학교 선후배인 그들이 동문들에게도 알리며 세력을 규합해 갔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지역 유림들과 힘을 합해 같은 해 4월 4일 양양읍 장날에 촉발하고 4월 9일 현북면 기사문리 만세운동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안원정 사모는 이어 말하기를 “기미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인산인해를 이룬 민중들 앞에서 김영학 목사가 연설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하다가 순경에 잡혀가 무수히 매를 맞고 서대문 감옥에서 6개월 간 보내고 출옥하셨어요. 그 당시 저는 그 해 2월 2일에 쌍둥이 딸을 낳았는데 지금도 잊을 수 없이 눈물겹도록 고생했지요”

당시 양양지역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상황보고 전문을 살피면 “4월5일 0시30 접수 / 本日(본일) 更(갱)히 襄陽郡(양양군) 邑內(읍내) 部落(부락)으로부터 耶蘇敎徒(야소교도)를 中心(중심)으로 한 數百名(수백명)의 一團(일단)이 邑內(읍내)로 進入(진입)하려 함을 阻止 (조지)함에 邑內(읍내) 徘徊者(배회자) 數百名(수백명) 呼應(호응)하여 萬歲(만세)를 唱(창) 하다. 主謀者(주모자)를 檢擧(검거)하고 解散(해산) 시켰으나 尙不穩(상불온)의 狀態(상태)이다.”

그러다가 이어서 “4월 5일 오전 10시 접수 / 昨夜(작야) 다시 襄陽郡(양양군) 邑內(읍내) 附近(부근) 人民(인민) 約六百(약육백) 邑內(읍내)로 來襲(내습) 邑內民(읍내민) 約五百(약오백) 比(비)에 和(화)하여 소요를 極(극)하며 특히 留置人脫監(유치인탈감)을 위하여 警察署(경찰서)에 侵入(침입) 狼籍(랑적)를 極(극)함으로서 武器(무기)를 使用(사용)하여 一旦(일단) 鎭壓(진압)하였으나 形勢不穩(형세불온). 暴民(폭민)死傷(사상) 있었다.”라고 기록됐다. 4월 5일 물치장날(강현면) 만세 피검자 명단에 다수의 교인을 볼 수 있다.

나흘 뒤 보고문은 다음과 같다. “4월 9일 접수 / “襄陽郡(양양군) 縣北面(현북면) 下光丁理(하광정리) 耶蘇敎徒(야소교도)를 中心(중심)으로 한 六百名(육백명) 4月 9日 午前(오전) 10侍(시) 棍棒(곤봉)을 携(휴)하고 萬歲(만세)를 高唱(고창)하면서 其士門(기사문) 警察官駐在所(경찰관주재소)를 襲(습)하여 暴行(폭행)하다. 때마침 江陵(강릉) 守備隊(수비대)로부터 步兵(보병) 5名(명)과 共力(공력)하여 發泡(발포) 鎭壓(진압)에 努力(노력) 暴民死傷(폭민사상) 9名을 出한 外에 負傷者(부상자) 若干(약간)있는 모양이나 不明(불명).”

주목할 것은 양양지역의 독립운동은 耶蘇敎徒(야소교도) 즉, 기독교인들이 주동했으며 그 중심에 김영학 목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철원애국단사건 판결문(최양섭 목사 사진 제공)

한편 김영학목사는 대한독립애국단(국내 비밀독립결사단체)에도 깊이 관여하여 1919년 10월에 <대한독립애국단 양양군단> 군단장을 맡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 3월에 양양에서 체포된 김영학목사는 1920년 12월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처벌령 위반”,“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6월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후 1922년 4월에 만기 출소한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극비문서에 김영학목사에 대해서 [민족절대독립주의, 배일사상포지자]로 규정하였으니 김영학목사의 “예수 잘 믿고 나라사랑하라”는 실천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섣불리 나설 수 없던 땅, 블라디보스토크에 서다

앞서 <나의 블라디보스토크 순례기>(1)에서 밝힌 것처럼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로의 이주는 19세기 중엽 빈곤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가 1919년 이후는 정치적인 이유로 본격적인 이주가 이어졌으며 1927년에는 적어도 25만 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정착했다.

1920년 9월 조선남감리교회 선교연회에서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의 한인들과 러시아인, 중국인들을 선교하기로 결의한 후 1923년에 간도일부, 하르빈, 시베리아(연해주)를 남감리교회 선교구역으로 확정했다.

김영학목사는 감옥에서 출소 후 (경기도)가평교회에서 5개월 목회하고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몹시 불안하여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러시아에 “누구도 가지 않는다면 나라도 가겠다”고 결심한 후 1922년 9월 열린 남감리교회 조선연회에서 시베리아선교사로 자원하여 블라디보스톡(당시명, 해삼위) 신한촌에 해삼위구역관리자로 파송받아 10월에 이주했다.

시베리아 지방회 기념사진. 중앙에 김영학 목사 (최양섭 목사 사진 제공)

안원정사모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곳에서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전도 강연과 동포들에게 애국 사상고취에 전심전력하는 한편 독립투사들과 연락하여 많은 분들과 왕래가 있었으며 교회에 들어온 헌금으로 많은 독립투사를 원조하는데 무한한 애를 썼어요”

당시 선교사들은 불신자를 전도하여 학습,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집례하고, 교우가정을 심방하고, 교회를 순행하며 예배, 사경회, 계삭회,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전도사 양성학교와 여자성경학교를 운영했다.

김영학 목사 명함 (최양섭 목사 제공)

1924년 연회록에 기록된 김영학 목사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교회를 순행하며 복음을 들고 십에 팔구는 有神(유신)을 증명하였고 각 교회 신자들은 핍박을 감수하며 믿음을 장려하여 성경의 모든 예언을 소중히 여겨 그리스도의 강림을 사모하는 자 많고 겸하여 신자도 가끔 가끔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 말씀의 맺힌 열매로 나무를 안다하신 것이 우부우부까지라도 밝히 양해되는 날이 멀지 아니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광대한 문이 크게 열려 아무나 감히 닫을 수 없을 줄 믿습니다”

 

 

단 한 명의 성도라도 있기에 떠날 수 없었던 블라디보스토크

1922년 10월 소비에트 혁명군이 시베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11월 <극동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라며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1924년경부터 공산당원과 공산청년들이 대중을 모아 놓고 “하나님은 없다는 無神論(무신론)을 증거 하려고 종교인들을 불러다 놓고 어려운 질문 29개를 준비해 놓고 공산당원들이 돌아가며 질문하는 형식의 “변증토론회”를 개최했다. 김영학 목사는 이 변증토론회에서 무려 8시간 동안이나 핍박을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 앞에서 홀로 담대하게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토론했고, 결국 무신변증(無神辨證)은 有神辨證(유신변증)이 되고 말았다. 김영학목사는 수많은 위협에도 유신의 신앙을 지켜냈고, 주일학교 활성화를 통해 더욱 담대히 신앙 수호에 앞장섰다.

하지만 공산당의 핍박은 더욱 치밀하고 가중되었다. 그들은 시베리아연회도 해삼위예배당을 비롯한 교회의 재산을 압수하고 기독교 학교를 폐교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선교 확장을 제한할 뿐 아니라 비자를 다시 발급해 주지 않아 강제출국시키거나 출국했다가는 다시 돌아올 수 없게 했으며, 종교 제한법(예배 신고 및 허가제)을 통해 기독교 활동을 극도로 통제했다. 또한 소비에트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과 교역자들은 생필품들을 배급받을 수 없게 했다. 공산당은 국적 취득 조건으로는 기독교 배교 및 정교회로의 개종을 강요했다. 결국 배급권을 얻지 못한 목사와 선교사들의 고통은 날마다 심해졌다. 이런 정책으로 1926년 러시아 한인 인구의 절반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다. 그러나 김영학 목사는 교인들을 위로하며 신앙을 지도하고 공산당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았다.

1927년 미국 남감리교회 선교부는 시베리아와 간도 지역에서 선교를 중단하기로 결의하고 선교사들에게 선교기지를 처분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미 1924년부터 연해주에는 미국인 선교사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1929년 시베리아 한인선교사들과 300명의 신자들이 북간도 동홍진으로 탈출했지만 김영학목사는 고난 속에서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를 탈출할 수 없는 교인들과 함께 남았다.

김영학 목사 가족 사진 (최양섭 목사 사진 제공)

급박해진 기독교조선감리교 총리원(본부)은 김영학목사에게 급히 철수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김영학 목사는 양주삼 총리사에게 답장을 하여 뜻을 밝혔다. “형님께서도 이곳 형편을 듣고 다 자세히 아실 줄 압니다. 교제도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지 아니하나 나의 본 양심을 가지고는 차마 떠날 수 없습니다. 날마다 곤란한 일이 많지만 이곳 교인들과 같이 당하기로 생각합니다...... 시베리아교회를 위하여 기도 많이 하여 주심을 바랍니다.”

김영학목사가 교인들과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며 선한목자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는 헌신적 모습에 교인들과 한인들이 위로와 힘을 얻어 모든 핍박을 견디어 가자 1930년 1월 3일 러시아 관헌들은 김영학목사를 <악질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블라디보스톡 감옥에 구금한 채 1년 동안 공갈. 협박. 회유책을 써가며 背敎(배교)를 강요했다. 체포되어 가실 때 마지막으로 “내가 기어이 이 놈들에게 잡혀가니 만약 살아나오지 못하면 너희들은 내가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피맺힌 말을 전하고 끌려가셨다. 이 광경을 목격한 큰 아들(7세)은 공포에 떨다가 쇼크로 사망했다.

공산당의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1931년 3월10일 <10년 중노동형>을 선고하고 배를 이용하여 영하4-50도 되는 콜리마지역 나가예바(나강) 굴락(강제노동감옥)으로 전감(7일간 이송)되었다.

김영학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순교' (최양섭 목사 사진 제공)

블라디보스톡 감옥에 구금 되었을 때 아내 안원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희생의 제물로 표현하며 순교할 것을 예시하고 있으며, 자녀들에게 옥중의 아비가 마지막으로 내리는 사랑의 교훈은 큰 감동을 주고 있다. 특히 큰아들의 죽음을 모르고 내리는 이 훈계는 너무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나를 위하여 아무 염려도 하지 말며 슬퍼하지도 마시오. 主(주)님을 위하여 犧牲(희생)의 몸이 되었으니 元貞(원정)과 子女(자녀)와 나의 영광으로 생각할 것으로 압니다. 이제 내가 자여들에게 敎訓(교훈)하는 것을 이 아래 기록하니 兒孫(아손)들에게 그대로 가르치시오. ......昶洙(창수)는 사자의 새끼라 凡事(범사)에 勝利者(승리자)가 되어서 위로는 主(주)님과 아래로는 人類(인류)에게 부끄럽지 않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봉사자 되기를 바라며, 暎洙(영수)는 어린 양 같이 양순하고 깨끗하여 예수님의 남은 자취를 밟아 萬人(만인)에게 福(복)을 끼치기를 바란다고 교훈하시오.” 1930. 12. 17. 囚禁 中에 있는 金永鶴

“永鶴(영학)의 몸은 主(주)께 바친 犧牲(희생)의 體(체)인즉 主(주)의 引導(인도)를 기다릴 것뿐이나 내가 十年(십년)의 징역을 받은 것은 낸 사랑하는 元貞(원정)과 兒孫(아손)들이 받은 줄로 생각합니다” 1931. 8. 31. 金永鶴 書

그 후 2년이 지났을 무렵 시베리아선교처 니콜스크구역 담임자였던 도인권 목사 명의 訃音(부음)이 가족과 감리교회에 알려진다.

“金永鶴(김영학) 牧師(목사) 兄(형)님은 昨年(작년) 陰(음) 十二月(日字未詳(일자미상))에 別世(별세)하셨습니다. 昨年(작년) 九月(구월)에 감챠스카에셔도 三晝三夜(삼주삼야)를 더 가는 나강 이라는 곧으로 실녀 들어가서 그 곧셔 눈(雪)치는 일을 하시다가 농가름에 빠져 世上(세상)을 떠나셨답니다.” 一九三三年 十月 一日 都寅權 上

최양섭 목사 (기감, 대죽교회 담임, 김영학 순교자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김영학목사의 일대기를 발굴한 최양섭목사는 생소한 용어인 ‘나강’과 ‘농가름’에 대해 추적 한 결과 나강은 마가단(옛 이름 나가예바)인 것을 밝혀냈다. 특히‘농가름’을 이렇게 말한다.

“농가름은 영하 4-50도 혹한으로 얼어버린 바다에서 생기는 현상인데, 이 지역은 겨울 바다의 얼음 두께가 4m 나 됩니다. 김영학 목사는 이 얼음 위에서 눈을 치우는 노역을 하다가 그만 그 틈에 빠져 순국하신 겁니다.”

이 후 기독신보(1933. 10.25일자). 동아일보(1933.10.31일자) 조선일보(1933.10.31.일자) 감리회보(1933.11.1일자)는 김영학목사의 순교를 보도했으며, 순교 사실을 전해들은 경성지방 교역자회는 1933. 10. 29. 오후 3시 종교교회 예배당에서 <재 노령 김영학목사 순교추도회>로 예배드리고, 1933.12.7. 제3회 기독교조선감리회 만주선교회시 첫 날 <고 김영학목사 추도회>로 예배했고, 간도 훈춘현 동홍진교회에서 <고 김영학목사 봉도식>이 드려졌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에서는 양주삼총리사가 1933년 10.31 「김영학목사 시베리아 선교를 하다 순교하다」라는 제목으로 미망인과 어린 사남매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한글. 영문 호소문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양주삼 목사는 김영학목사로부터 받은 답신을 소개하였다. “선교부에서 신변이 위험하니 철수하라는 권고를 받았음에도 답장하기를 <여기에 단 한 사람의 성도라도 남아 있다면 어떤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더라도 떠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무리들에게 <참 목자> 였습니다. ..... 그는 그의 소명에 죽음으로까지 성실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교회에 참다운 사역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김영학 목사는 감리교회 해외파송 선교사로 첫 번째 순교자인 것이다.

대전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순국선열 김영학의 묘(최양섭 목사 제공)

현재 김영학목사는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묘소가 있으며 이 자리에 1990년 아내의 유해를 모시며 김영학목사의 위패와 함께 조성했다.

단 한 사람의 성도가 있으니 떠날 수 없던 블라디보스토크. 선교지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두운 저녁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토크의 불빛들은 김영학목사가 차마 두고 떠날 수 없던 교인들의 눈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김영학목사 기념사업 및 블라디보스토크 선교지 문의 : 김영학목사 기념사업회 회장 최종호목사(기감, 경기 광주교회 담임), 사무국장 최양섭목사 (기감, 대죽교회 담임 010-3367-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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