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조철현 신부는 누구인가?

2019년 3월 11일은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광주지방법원 법정에 소환되는 날이다. 아직 살아있는 전두환은 이미 고인이 된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고발당하여 수차례 법종출두를 거부하다가 결국 강제 소환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직 대통령을 법정으로 소환한 조비오 신부는 누구인가?

비오 조철현 신부는 5.18 당시 광주대교구의 신부로서 당시 계엄군이 도청을 향하여 헬기에서 공중사격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여기서는 비오 조철현 신부가 개신교 수도공동체였던 소화자매원을 공식 가톨릭수녀원으로 개종시킨 사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소화자매원은 개신교 수도공동체 동광원의 산하 단체였다. 1956년 오방 최흥종 목사에 의해 광주 무등산 자락에 설립된 무등원(폐결핵환자 수용시설)을 맨발의 성자 이현필의 제자들이 운영하였고, 나중에 광주 봉선동으로 이전하면서 1981년 소화자매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소화자매원은 동광원의 창시자 이현필 선생의 제자였던 김준호 선생이 평생 책임을 맡아 운영해왔다. 오방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 선생의 의부로서 개신교의 유일한 수도공동체 동광원이 광주에 정착하도록 배려하였다.    

소화자매원 지도자 김준호 선생과 조비오 신부

소화자매원을 가톨릭 수녀원으로 개종시킨 조비오 신부 

1970년에는 차츰 가톨릭 신앙 안에서 봉사활동을 하고자 하는 자매들이 모여 들면서 1976년경 소화자매원은 내외적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자매들은 성탄 자선모금을 하러 성당 문을 두드리게 됐다. 마침 그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던 조철현 비오 신부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자선을 하게 된 사연을 듣게 됐다. 조비오 신부는 모금을 하러 온 그 자매들에게 “수녀원에 갈 맘이 있느냐"며 넌지시 수녀원 입회를 권유하시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가족들을 버릴 수는 없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그 모습에 감명을 받은 조비오 신부는 그들 안에 현존해 계시는 예수님을 따라 저절로 그 공동체에 찾아가고픈 충동을 느끼게 됐다. 그후 직접 그 공동체를 방문한 조신부는 ‘작음의 영성'을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였던 자매들은 가톨릭으로 점차 개종을 하고 영세를 받아 성사생활로 신망애를 키우며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어 갔다. 드디어 1981년 개신교 수도공동체 무등원이 소화자매원으로 개명되었고, 원내에 성당도 설립되었다. 그 후 대부분의 초기 수도자가 70세의 노령에 이르고, 젊은 수도자의 발길이 끊기면서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천주교 신부인 조비오 신부(당시 소화자매원 이사장)의 헌신과 배려로 천주교 수녀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당시 윤공희 광주대주교는 섬김과 나눔의 생활을 통하여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봉사하고 가난과 겸손으로 꾸준히 기도 생활을 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후, 마침내 1999년 1월 18일 “예수의 소화수녀회” 창설을 허락하여 회헌과 회칙을 인준해 주었다. 그래서 천주교 수녀들을 새로 받아서 노년의 동광원 수녀들이 생의 마지막 봉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 가보면 가족에게 버림받은 수백명의 불치병 환자들이 따뜻한 사랑으로 수십년 째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이런 나눔의 실천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인가? 80년 5월을 핏빛으로 물들인 빛고을 광주가 바로 이런 곳이다.

그러나 개신교 수도단체 무등원이 기독교계의 옹졸함으로 말미암아 한국기독교의 유일한 수도원으로 남아있을 여지를 마련해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오방 최흥종 목사를 이어서 그들을 품어낼 수 있는 한국교계의 목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1991년도에 장수와 무등산에 있는 동광원의 수련원에서 몇주간 머무르며 동광원 지도자 김준호 선생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은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젊은 지도자를 찾는 그들에게 이미 가정을 꾸린 필자는 그 어떤 결단도 할 수 없었고, 그 후로는 가끔 들려서 안부나 묻는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무등산에서 요양중인 김준호 선생을 만나러 들렸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김준호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소화재매원이 완전히 카톨릭의 정식 수녀원으로 자리잡게 되어 고령의 수녀들이 여생을 보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된 것은 김준호 선생과 조비오 신부가 남긴 유산이었다.  

김준 (전)새마을중앙교육원장과 김준호 선생 및 조비오 신부

 

오방을 이어서 이현필을 수호한 조비오 신부

20세기의 성자, 한국기독교의 큰 영혼 오방 최흥종 목사는 동광원의 창시자인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고 아끼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동광원 식구들이 가족적인 삶을 거부하는 독신주의는 결코 반대했다. 동광원(東光園)의 사회활동은 지금도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에 위치한 소화자매원으로 이어지다가 점차 사회복지법인 소화정신요양원, 사회복지법인 소화천사의 집, 예수의 소화수녀원으로 분리되어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소화자매원은 개신교 수도공동체로 1956년 6월 교파를 초월하여 복음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미소함을 본받는 삶을 실천하도록 강렬한 충동과 이끄심을 받은 자매들이 모여 살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현필 선생의 후계자 김준호 선생이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생을 살고픈 마음으로 다리 밑 거지천막에서 그들을 형제 삼아 함께 살면서 점점 작음의 영성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을 읽게 되면서 성 프란치스코와 공통된 작음의 영성을 발견하여 작음의 신비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작은 영혼들 즉 자매들이 모여들었고, 함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광주시 북구 화암동에 ‘무등원'을 마련하여 결핵으로 죽어가는 환우들을 친형제·자매처럼 돌보는 삶을 살게 됐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