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역임. 도서출판 교회와성경 편집인 https://www.facebook.com/ChurchAndBible

1. 잠언 8장의 구조와 특징

첫 번째 지혜의 강론(1:20-33)에 이어 잠언 8장은 지혜의 두 번째 강론으로 첫 번째 강론과 같이 지혜가 스스로를 1인칭으로 부르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강론과 외경인 시락서 24장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지혜가 자신을 1인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 사실은 지혜가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음을 시사하는데 지혜가 자신을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같은 존재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22-31절).

8장은 도입부(1-3절)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지혜의 강화들(4-11절, 12-21절, 22-31절) 그리고 결론부(32-36절)로 구성된다.

도입부는 지혜가 자신의 말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자리를 잡고 지혜의 말을 들으라고 초청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1:20-21 참고). 이것은 5-7장에서 언급되었던 반신국 세력을 상징하는 음녀의 폐쇄적인 은밀성과 달리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지혜의 개방적인 보편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지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혜의 첫 번째 강화(4-11절)에서 지혜는 인간 전체를 대상으로 직접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의와 진리라고 소개하고 자신의 높은 도덕적 고상함을 말한다. 두 번째 강화(12-21절)에서 지혜는 지혜의 길을 따르는 것의 가치와 유익을 제시하고 지혜로 말미암은 통치자들(16절)과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17절)에게 지혜가 가져다 주는 유익들을 제시하고 있다. 세 번째 강화(22-31절)는 지혜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창조에 참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결론부(32-36절)는 하나님의 명령과 지혜의 말을 경청하고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선포되는 복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써 음녀의 추종자들이 음침한 사망의 길을 가는 것에 비해 지혜를 따르는 자들은 광명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2. 지혜의 개방적 보편성

밤중에 은밀히 사람을 유혹하는 음녀의 퇴폐적인 모습(잠언 7:6-23)과 달리 지혜는 밝은 낮에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1절). 지혜는 큰 길, 성문과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광장 등과 같은 곳에서 사람들을 부른다. 이것은 언제든지 접촉하며 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지혜가 존재한다는 지혜의 보편성과 개방성을 강조하고 있다.

큰길, 광장, 성루, 성문 등은 공공의 장소이다. 비록 이 장소들이 다양한 처소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장소들은 성문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장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한 공공의 장소를 지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곳은 상업, 사법 활동, 사회적 교류의 중심지이며 공동체 삶이 이루어지는 중심지이다.

그러므로 이 묘사는 공동체 삶의 가장 평범한 장소 곧 자선, 구제, 흥정 및 온갖 일상 생활이 펼쳐지는 곳에서 지혜가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성문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의 자리였는데 바로 이곳에서 지혜가 외친다는 것은 사소한 평상적인 일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의 시비가 이루어지는 성문에서 지혜가 더욱 분명하게 보여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혜의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부름은 지혜가 은밀하고 폐쇄적인 가정에서부터 일상 생활 즉 일상의 말씨와 행동에까지 지혜가 나타나야 하고 외쳐져야 함을 지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국가적인 통치 형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일상 생활 나아가 모든 개인의 은밀한 생활 구석구석에까지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범국가적이고 개인의 일상 생활에까지 이루어지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지혜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외쳐진다 할지라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하면서도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잠언은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라”(잠 2:6)고 하며 지혜는 전적으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너희는 들을지어다”(잠 8:4-5)라는 지혜의 외침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누구나 듣고자 한다면 지혜의 청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할지라도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the simple)이거나 또는 미련한 자들(the naive)일 뿐이다. 그들은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오직 명철한 분별력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자만이 지혜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잠언의 기록 목적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다. 잠언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을 깨닫게 하고, 지혜와 정의와 공의와 공평의 훈계를 받게 하며, 우매한 자에게는 슬기를, 청년에게는 지식과 분별력을 주는 것”(잠 1:3-4, KJV)이라고 그 목적을 밝힌 것처럼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잠 1:5)이다. 이것은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

따라서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너희는 들을지어다’(5절)는 명령을 받는 대상에 정작 어리석은 자와 미련한 자들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혹한 말씀은 지혜와 우매 사이에서 단호한 양자택일을 서술하기 위한 강조에 그 목적이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지혜의 부름을 받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그 지혜를 깨닫고 얻을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깨닫는 마음이 있는 자들에게만 지혜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그 깨닫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혜는 단순히 지적인 대상이 아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것은 윤리성을 포함하는 모든 생활의 실천적 삶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잠 8:6)는 지혜의 선언이 이 사실을 증거한다. 이 구절은 “들으라, 내가 가장 고상한 것들을 말하며 내 입술을 열어 옳은 것들을 말하리라”(필자역)고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하게 그 뜻을 밝힌다. ‘들으라’는 당연히 쉐마(המשׁ)를 연상케 하는 절대적인 선언이다. 이 선언은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잠 1:3) 하기 위한 잠언의 목적과 부합하며 상대적으로 악한 자들(1:11-14)과 낯선 여인(5:3)의 음흉한 말과 대응된다.

지혜는 악한 자들이나 음녀와는 철저하게 구별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 악한 길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잠 6:1-19 참고). 지혜의 말은 정직하고(올바르고) 진실하며 의롭다. 곧 지혜의 말은 실체(實體) 바로 그것이다. 어느 것도 굽었거나 부패하거나 왜곡되지 않았다(7-8절). 때문에 “그것들을 깨닫는 자에게는 모두 알기 쉬운 것이요,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옳은 것이니라”(잠 8:9, KJV)는 말씀처럼 깨닫지 못하거나 무지한 자는 지혜에 대하여 적절하게 반응할 수 없다. 사실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은 은이나 금으로 만족하고 지혜를 부차적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10-11절).

3. 하나님 나라 건설의 원동력인 지혜

12-21절에서 지혜는 청중들에게 자신이 행하는 두 가지 일을 설명하고 있다. 지혜와 왕들과의 관계(12-16절)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지혜가 가져다 주는 유익들(17-21절)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지혜는 자신을 가리켜 “나 지혜는 책략(המרע)과 함께 있으며 계략의 지식(תומזמ תעד)을 찾아 얻었다”(12절, 필자 사역)고 전제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고 선포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책략(המרע)과 계략(המזמ)은 교묘한 기술과 계획의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들이라는 점에서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다”(잠 8:14)는 구절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 8:15-16)는 잠언의 선언은 13절(“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과 병행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세상의 통치자들은 지혜의 책략과 계략을 따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제거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을 위해 쓰임을 받아야 하며, 그러한 사명을 수행하는 왕들과 방백들과 재상들과 재판관들에게 지혜는 자신의 책략과 계략을 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혜는 왕을 비롯한 통치자들이 지침으로 삼는 거울이다. 이 주장은 솔로몬이 은사로 받은 지혜의 역할과 일치한다(왕상 3:9, 28).

이 땅의 통치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세계 통치를 위임받은 대리 통치자들이다. 따라서 모든 통치자들이 이 땅을 지혜로 다스려야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가 주는 의, 신중, 분별, 적절한 판단력을 가지고 여호와 경외를 이 땅에서 구현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통치자는 계속적으로 지혜의 지지를 받으며 그들의 위(位)가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랑은 상호의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은 지혜와 지혜를 찾는 자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찾다(seeking)와 만나다(finding)는 말은 7장에서 청년을 유혹하던 음녀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잠 7:15)는 말속에서 이 말은 ‘성애’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아 3:1-4; 5:6 참고). 이런 점에서 17절은 7장에서 지혜와 그 찾는 사람 사이에 부부 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잠 7:4)는 말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된다. 신성한 혼인의 관계를 상징하는 이 단어들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17절은 지혜와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7장 참고).

지혜를 얻음으로 얻는 유익은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잠 8:20-21)는 말속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의(הכדצ)와 공평(טפשׁמ)은 여호와의 속성이며(사 5:16; 행 9:23-24)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이런 점에서 지혜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된다. 때문에 의와 공평에 근거하여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은 결코 낯설지 않다.

4. 지혜 안에서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

지혜는 창조 때에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앞서 여호와로부터 탄생했다는 선포(22절)는 31절까지 지혜와 여호와의 관계를 불가사의한 관계로 전개된다. 8장 초두에서부터 지혜를 의인화함으로써 인격을 부여하고 심지어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과의 부부관계처럼 친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혜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혜는 초시간적이며 영원 전부터 발생했다는 점에서 지혜가 신적 속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유한 인격적 존재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지혜가 한 인격 속에 환원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가 축적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골 2:2-3 참고). 즉 그리스도는 인격으로서 지혜이시다. 지혜가 인격으로 연결되는 것은 지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진리이며 길이며 벗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23-26절은 잠언 3장 19-20절을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함으로써 그 어떤 표현도 따르지 못할 창조의 경이스러움을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요한복음 1장 1-5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그리스도의 영원 발생설을 증거하는 것 같다. 특히 창세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피조물들의 탄생 기사(창 1:6-10)에 지혜가 그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27-28절)은 지혜가 곧 창조주와 동등한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지혜의 신적 존재에 대한 묘사는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 8:30-31)는 말씀 속에서 극치를 이룬다. 지혜는 하나님께 기쁨의 근원이었으며 지혜는 하나님의 기쁨이셨다. 그리고 지혜는 사람이 거처할 땅의 기쁨이었고 사람들 사이의 기쁨이셨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골로새서에서 명확하게 재확인하고 있다(골 1:15-18).

인격이신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 바로 성육신 사건이었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 기자가 증거하고 있다(히 1:1-3).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 42:1)는 예언이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고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는 말씀 속에서 성취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셨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 8:35)는 지혜의 선포처럼 생명은 곧 여호와께 은총을 얻는 것이며 그 생명의 길은 바로 지혜 자신이다. 때문에 지혜를 떠난 자들은 스스로 자기의 영혼을 해치는 형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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