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생명체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생명체와 관계 안에서 존재합니다.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와 관계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은 그 생명체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과 관계 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체들의 관계의 질서를 통해 생태환경이 형성되고 조정되고 보존되고 발전됩니다.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서 하마를 많이 사냥하여 하마 개체수가 줄어들자 말라리아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역학조사를 하였더니 강 웅덩이에 모기가 알을 많이 낳는데 하마가 거기 들어가 놀면서 물을 휘저어 모기 알이 물에 떠내려가게 하여 모기 개체 수를 줄였는데, 하마가 줄어들자 모기 개체 수가 늘어나 말라리아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마와 모기, 말라리아와 하마의 관계를 우리는 잘 몰랐습니다.

산불이 나면 산 아래 냇가에 물고기가 살지 못합니다. 산불 때문에 유기물의 먹이사슬의 근원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회복되려면 몇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관계 가운데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도 인간 상호 의존적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영적 생명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영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이웃과 교우들과 친구들과 모든 사회 구성원들과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상호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인간관계를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생명체의 관계 일반에 대해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인간관계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곧 생명 활동이고 신앙이고 삶입니다. 신앙과 인간관계는 별개의 영역이 아닙니다. 부부관계, 가족관계, 교우관계, 나아가 모든 대인관계 그리고 자연과 환경과의 관계가 모두 신앙생활의 영역입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현실적으로 신앙생활을 예배, 기도, 전도, 교회활동 하는 것에 국한하여 이해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와 같은 오해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임박한 시점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며 경쟁하고 다투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제자들에게 변화산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시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인 예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구체적 예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께 대하는 태도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들과만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불신자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불신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약자에 대한 관계와 태도도 매우 중요하고 무엇보다 믿는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인간관계와 환경과 사물과의 관계를 바르게 갖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적인 약자들과의 관계, 제자들끼리, 즉 믿는 사람들끼리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이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주의 할 것은 그 구별이 어떤 수준에 대한 구별이 아니고 신분에 대한 구별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구별이 수준에 대한 구별이 아니고 신분에 대한 구별이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의 윤리 도덕적 수준이 세상 사람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학벌이 반드시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듯이 재물이나 권력이 인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 사람보다 인간됨의 수준이 못하다는 사실을 인간관계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 안 다니고 믿음이 없어도 윤리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고 부러워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직 면에서는 선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윤리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는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지식을 갖추지는 못해도 자신의 지식수준과 윤리수준을 정직하게 인정한다면 하나님 나라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고유한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의 대인관계를 좋게 할 수 있는 길을 꾸준히 모색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두 가지 실수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신앙을 양보하면서까지 대인관계를 좋게 하는 쪽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게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런 경향이 좀 두드러집니다. 둘째는 기독교의 고유한 신앙만을 강조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태도입니다. 극단적인 경건주의자들이 이런 실수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불신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느냐는,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산상보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햇빛과 비를 주고 안 주는 권한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에게 그런 권한이 주어진다면 모르긴 해도 순식간에 갑을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괜한 우려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세상 권력에 대하여 갑질한 역사가 많습니다. 심지어 청교도들까지도 갑질을 했습니다.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세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교회가 행사할 권리가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불신자들에 대하여 실수할 가능성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별을 강조하였던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방인의 기업을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신 것이 마치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의 것을 빼앗아 가져도 괜찮은 것으로 이해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의 것을 빼앗아도 된다는 논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 위해서 무조건 쫓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때때로 이방의 나라와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들은 단순한 도구로만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기회나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기회는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반은총을 누릴 권리가 그들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이 누리는 일반은총의 기회를 빼앗아도 안 되고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방인이 지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종노릇을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일반은총을 누릴 권리까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방인이 일반은총을 누리는 자유와 권리를 아무도 제한하거나 빼앗을 수 없고 방해할 수도 없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거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요단강 동편에서 에서의 후손과 롯의 후손인 모압과 암몬인의 땅을 통과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의의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명기 2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땅을 통과할 때에 그들과 싸우지도 말고 그들을 괴롭게 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서의 후손과 모압과 암몬이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떠했는지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과 싸우지 말고 그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는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땅을 통고할 때 양식도 사먹고 물도 돈을 주고 사서 마시라고 합니다. 그 명령이 얼마나 지엄한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몇 번이나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기업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기업을 주시고 롯에게도 기업을 주셨습니다. 이삭에게만 아니라 이스마엘에게도 주셨고, 야곱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고 에서에게도 주셨습니다. 기업의 내용은 다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만 기업과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기업과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주신 복과 기업을 한 발자국이라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일반은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예배나 기도나 전도나 선교나 그 어떤 선한 일이라도 이방인의 기업을 범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점을 사려 깊게 고려하여 특별 은총을 받은 자는 일반은총의 질서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식의 삶의 태도가 되지 않도록 언어 사용과 사회 질서와 예의와 염치와 정치와 문화 일반에서 조심하여 이방인의 기업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이방인들의 기업을 범하는 용감성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기업을 존중하는 태도와 함께 증거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에서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신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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