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인간 상호 관계나 사물과의 올바른 관계의 토대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인간관계와 인간의 사물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별개인 것처럼 취급하고 있으나 성경의 가르침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는 이 둘의 관계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할 만큼 그 관계가 깊이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웃과의 관계가 곧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관계나 인간의 사물과의 관계는 그것이 곧 신앙의 형식이란 설명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웃이나 사물과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간관계나 사물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게 되면 율법주의나 광신적이 되거나 나아가서는 윤리를 무시하는 하급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인간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고, 그 영향이 나보다 약한 자에게는 크게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언행이 나보다 강한 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나보다 강한 자는 나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지만 약한 자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물리적 힘이나 권력이나 부나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가 나보다 나은 사람에 의해 쉽게 그 자유를 침해 당합니다. 최근 들어 갑을 관계에서 발생하는 갑질이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문제가 새롭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 타락 이후에 줄곧 있어 온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인식하게 된 것뿐입니다. 그러나 소위 “갑질”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갑질이 인간의 기본 권리를 침해한다는 원칙적인 면에서는 나쁜 것이지만 어떤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갑질처럼 보이는 언행이 그 두 사람의 특별하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지금 문제로 지적되는 갑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삼자에게 갑질이라고 생각되는 언행이 당사자에게는 아름다운 가치를 지닌 관계 질서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부당하게 기본 권리를 침해 당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로 보호하는 일과 소위 갑질에 대한 지나친 문제 제기로 인하여 보편 가치나 아름다운 개인 관계까지 침해하지 않도록 사려 깊게 대처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소위 갑을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작은 자”를 죄짓게 하는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죄를 짓는 것은 당사자이지만 약한 자는 강한 자의 영향으로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전제한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교훈을 살벌하게 느낄 만큼 엄중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손이나 발이나 눈이 죄를 범하거든 제거해 버리라고 하실 만큼 엄중하게 취급하셨습니다. 갑을 관계에 대한 교훈의 연장선에서 그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갑의 손발이나 눈이 을을 죄짓게 하면 제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의 주변에 있는 을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을이 바로 주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을의 실존이 주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관계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갑이라면 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진위가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곁에 있으면서 나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받는, 이를테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주 쉽게 생각하고 좀 심하게 해도 대항 못하는 그 사람이 나의 주님입니다. 이 인간관계, 즉 갑을 관계에서 신앙이 판가름 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나 노숙자가 나의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한다면 허락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룻밤 허락했다가 계속 눌러 지내려 한다면 감당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감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못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요구를 들어주었다가 가정불화가 생긴다면 그것도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 무례한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이 최선은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고 나의 선행이 나의 영향을 받는 또 다른 나의 가족이나 이웃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모든 선행은 감당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선행을 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서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사회계약은 위계질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위계질서란 모든 사람이 자기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 당연히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도 인정하고 존중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과 민주사회의 도덕, 공공질서 및 일반적 복리에 대한 정당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에 따라 개인에게 일정한 제재를 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계질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과 부자들과 인텔리들과 힘 있는 자들에 의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모든 사람을 상하 관계 아래 들어가게 합니다. 힘없고 많이 배우지 못하고 약한 자들은 자기들보다 힘 있고 많이 배우고 강한 자들이 자기들의 정당한 권리와 자유와 이익을 보장해 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곧 환상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남보다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될 때 그 권한이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라는 뜻임을 생각하기보다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게 되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장님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중심 역할의 오류(the fallacy of centrality)'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요 법철학자인 액턴은 “모든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현역 대장이 부인의 갑질로 인하여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남편의 지위와 힘을 이용하여 아래 사람의 권리와 자유와 몸과 정신까지 침해하였다고 합니다. 군대에서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특수 규율로 인하여 갑질이 가장 많이 행해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의 갑질을 어떻게 규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높은 계급의 군인 아내가 기관병에게 한 도를 넘는 갑질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경우도 어느 정도는 아름다운 관계 질서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정도가 지나쳐서 갑질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한국사회 문제는 거의 갑질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군대에서 상관이 부하에게, 직장에서 상사가 아래 직원에게, 교수가 조교에게, 대기업 관계자가 하도급 업체 관계자들에게, 고위 공직자가 하위 공직자에게, 담임 목사가 부목사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심지어 부모가 자녀에게까지 갑질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패악의 갑질의 경우가 드러나면 언론이 호들갑을 떨고 우리 모두가 화를 내지만 어떤 사람이 특별히 악하여 갑질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본질과 수준 때문에 갑질의 매력에 쉽게 빠져듭니다. 돈이 많고 학문이 깊고 권력을 갖게 되고 명예와 인기를 얻으면 갑질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자연스러워집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이 주위의 다른 사람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갑질은 정당하고 당연하여 조금도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갑질을 한다는 의식도 못합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자기의 갑질로 인한 고통을 꺼억 꺼억 참고 있는데도 그들이 모두 자기의 덕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자 폴 피프(Paul K. Piff)는 여러 실험을 통해 상류층 사람들이 속임수를 더 잘 쓴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갑질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힘 있는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갑질의 종류도 성희롱, 막말, 반말, 부당한 일 강요, 협박, 폭력 등 다양합니다. 이런 갑질이 군인,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판사, 검사, 대학 교수, 심지어 목사들에 의해서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집단과 계층에서 일어나는 갑질의 피해는 더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정규직 종사자의 비정규 직 종사자에 대한 갑질이 다반사라는 지적입니다. 레가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은 생활만족도가 110개 OECD 국가 중에 104위라고 하니 한국 사회에서 갑질이 삶의 만족도를 감소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던 시대에도 갑질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아들들을 높은 지위에 앉혀 달라고 등용 청탁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청탁이 부당하다는 지적보다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얻어 갑질하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자신들에게 좀 더 솔직해 지면 사실상 부자 되고 박사 되고 교회가 부흥되고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것도 갑질 하는 즐거움을 탐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갑질하는 사람은 즐겁지만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지옥 경험입니다. 갑질은 부자도 박사도 교수도 목사도 사제도 승려도 심지어 모든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짓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갑질 하는 재미로 살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너희는 갑질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인간관계에서 갑질은 없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갑질 하는 사람도 그 나라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마 20:2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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