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14) -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2천 년대 이후 세계는 점점 독서와 감사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독서력은 급격한 전자기기의 발달로 인해 떨어졌다. 휴대폰, PC, 태블릿, 노트북 등에 의해 독서할 기회를 잃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다. 작금에는 핸드폰과 PC의 중독을 우려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교육계에서는 중고생의 25% 가까이가 핸드폰 중독, 게임중독 성향에 가까운 수치에 이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유럽은 시리아전쟁 난민 몸살로 정치지형마저 바뀔 태세다.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인 이유로 폭탄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소시민과 영유아들을 상대로 한 묻지마 자폭테러까지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유럽은 그 공포가 도를 넘어섰다. 중국, 동남아, 중남미 아메리카 등 기근과 지진과 쓰나미, 폭풍우 등 자연재난 등으로 심히 어수선하다. 무엇을 말함인가? 감사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의미다. 우리는 자고 일어나면 유럽과 아시아는 물론 아메리카대륙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식들(대개 나쁜 소식들...)을 뉴스로 접한다. 예전 같으면 모르고도 살 일을 지금은 그렇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 그리고 불안과 걱정들이 많다.

문재인 정부의 출발과 함께 내수는 살리기에 취업, 정규직, 인권, 평화, 대화, 민주화, 자주, 자립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수출은 아직 부진하다. 높은 청년실업률에, 취업하기 어렵다고 야단이다. 우리나라와 지방정부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정 부채가 나라발전에 근심거리다.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카드를 만지작거린다는 소리에 다들 불안하다. 북한은 핵개발과 미사일개발로 미국을 비롯하여 남한 전역을 사정권 안에 두고 ‘서울 불바다 운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정과 민생이 불안하다. 문재인 정부는 선심성(?) 복지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당장 소시민들은 좋겠지마는 복지예산의 폭발적 증가가 가져올 재앙에 언론들은 연일 쓴 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그것도 우리 후세대들의 몫이라니 걱정이다.

2017년, 살충제 계란파동에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와 군대도 계란급식을 중단했다. 살충제계란 파동으로 양계닭까지 살처분해야 한다고 한다. 가족건강을 위해 청정란을 고가에 구매하여 먹던 계란이 살충제 범벅이라니 믿을 데가 없다. 2011년에는 구제역으로 소,돼지 100여만 마리를 살처분한 바 있다. 2017년초에는 AI여파(조류독감)로 닭,오리 2천4백여만 마리나 매몰했다. 인간의 패악이 저지른 죄의 대가인가. 불안하고 근심이 크니 감사하기 더 어려운 시대다.

먹거리에, 정치, 경제, 사회문화, 남북관계 등 어느 것 하나도 평안한 데가 없다. 불안하니 근심되고, 걱정하니 염려뿐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27,31,34)

이 같은 시대현상에 그냥 매몰될 순 없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돌파구는 감사가 제일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4)

그런데 필자가 연구하고 독서한 결과에 의하면 독서와 감사는 매우 닮은 데가 있다. 이 둘의 유사점을 통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서들을 더욱 농도 있게 찾아보자.

첫째로, 닮은 점은 이 둘은 중독이 없다. 이 두 가지는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침이 없다. 세상에 몰두해서 중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운동도 중독이 있고, 약도 중독이 있으며, 담배와 술, 도박은 중독의 대명사이다. 그런데 독서를 많이 한다 해서 중독은 커녕 오히려 창의적 아이디어와 신선한 디자인으로 앞서가는 사람이 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감사를 많이 해도 중독에 걸렸다는 보고가 없다. 감사를 많이 한 사람이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다든가, 축산농장에서 감사를 하면 젖소가 우유를 많이 생산한다는 것하며, 화훼농부가 감사했더니 꽃은 더욱 만개하더라는 등의 보도가 있다. 멋들어진 세상의 원리다. 이 같은 이유로 감사를 매일 하는 사람은 존경받는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 영적으로 리더가 될 승수가 크다. 양질의 좋은 독서가 인물을 키우는 원리요, 리더를 만드는 데 유익하다면, 감사 또한 영적 리더가 될 자질을 모색하는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감사는 리더 중의 리더를 키운다고 말하고 싶다.

둘째로, 독서와 감사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이것들은 처음부처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일정한 습관이 정착되어야 성공한다는 뜻이다. 해서 처음부처 독서를 잘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독서라는 책읽기에 인내하는 습관이 붙어준다면 놀라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감사 잘 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감사하는 삶도 처음이 낯설지 일주일씩 3주 만 잘 노력해 성공하면 멋진 삶의 스타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셋째로, 감사는 독서와 닮은 데가 많다. 독서는 앞서가는 사람을 만든다면 감사는 함께하는 사람을 만든다. 독서가 개성 있는 사람을 만드는 샘이라면 감사는 융합하는 사람을 만드는 우물이다. 독서가 창의성의 원천이라면 감사는 융복합의 원리를 만드는 출발이다. 감사는 그런 의미에서 독서와 닮은 데가 매우 많다.

반면에 독서는 연역적이라면 감사는 귀납적인 데가 있다. 독서가 독재형의 인물을 키운다면 감사는 민주형을 지향한다. 독서가 앞을 향해 달려가게 한다면 감사는 좌우를 살피며 달리는 스타일이다. 독서하는 이가 잘 나가다가 한방에 함몰웅덩이 빠지는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감사하는 이는 도무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독서가 일등을 만들지만 감사는 일등을 바라보며 자신의 뒤에 처진 3,4,5등을 바라보고 안타까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하는 이와 감사하는 이는 둘 다 리더형 이지만 감사의 사람이 더욱 오래도록 탈 없이 성공할 징후가 농후하다.

독서를 통한 지성에 인성과 덕성을 함양해주어야 하며 더욱이 감사영성을 더해 주기만 한다면야 금상첨화(錦上添花)라 하겠다.

 

독서도,

꿈도,

그리고 감사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다만 과정일 뿐이다.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과정 말이다.

 

어떤 이는 독서가 많은 사람을 훌륭한 인물로 키운다고 말한다. 그럴 가능성이 큰 것뿐이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꿈도 마찬가지다. 꿈이 있는 아이는 목표가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꿈이 없는 아이에 비해 훨씬 큰 인물이 될 확률이 크다. 하지만 꿈이 곧 목적은 아니다. 꿈이 있다면 없었던 아이보다는 여러 가지 생각과 접근들이 시도 되었을 터이다.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독서와 감사의 비슷한 점은 터널에 비유할 때 어울린다. 독서는 보이지 않고 무엇인지 모르는 산 너머의 세상,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터널과 같다. 그러므로 독서가 가져다주는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에디슨은 살아생전에 일천여개의 발명특허를 냈다. 그런데 그를 초대하는 회사에 에디슨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 그것은 도서관이다. 연구소 곁에 늘 도서관을 지어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바로 발명의 기저가 독서에 있음을 알리는 대목이다.

감사도 독서와 매우 비슷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행복으로 인도하는 최고의 지름길은 감사라고 한다. 감사는 기쁨을 낳고, 감사는 평안을 낳으며, 종국에는 행복으로 인도한다고 말이다. 감사가 곧 행복은 아니다. 행복으로 가는 기찻길이요, 과정이요, 터널이요, 길(고속도로)이다.

‘행복해서 감사한 게 아니라 감사해서 행복해진다.’는 경구를 새겨볼 만하다.

존경하는 선배는 말한다. ‘클로버의 세 잎은 행복이고, 네 잎은 행운이라 하지요? 사람들은 네 잎의 행운만을 찾으려고 그 흔하디흔한 행복을 놓치고 산다고.’ 감사만 하면 행복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연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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