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중부교회 최연석 목사 주일 설교(2017. 8. 27)

전도서 3:11~13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고린도전서15:14~19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며칠 전 지금까지 고락을 같이 했던 후배가 헤어지면서 뜬금없이 이런 말을 던졌다. 최근 자신에게 꽂히는 말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궁금해 했더니 어느 가수의 콘서트 제목이라면서 이 제목 때문에라도 꼭 가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이 드신 분들은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조동진이라는 가수가 암으로 투병하다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콘서트를 하면서 그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는 것이다.

-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故 조동진 가수는 이 설교가 있었던 다음 날인 8월28일 70세로 별세했다)

나에게도 그 말이 섬광처럼 꽂혔다.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다른 생각 할 것 없이 ‘우리’라는 말이, ‘같이’라는 말이 그렇게 마음을 울컥하게 할 수가 없었다. 본 설교의 내용이 어떤 것이 되든지 우선 이 제목에 은혜를 받기를 바란다.

최연석목사, 여수중부교회 담임, 전 여수YMCA 이사장, 설교집 <동행>

1. 아모르 파티(Amor fati)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먼저 ‘아모르 파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현인들은 말한다. 운명을 사랑하라,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지금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은 그 운명이 형성되었던 모든 과정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영어의 시제에서 현재완료처럼 과거의 사실이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말은 너의 과거를, 살아온 날들을 사랑하라는 말로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운명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닥쳐오는데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그 운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할 수 있을 때, 창조적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과거란 밝고 명랑한 것이라기보다는 음울하여 밝은 대낮에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것들이 많기 마련이다. 실패와 비겁, 어리석음과 치기 등으로 뒤범벅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러한 어두운 과거가, 세상의 여기저기에서 차이고 꺾이고 깨졌던 아픔이, 조금 더 나은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지금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다면 그의 운명이, 과거가 그렇게 감사할 만큼, 찬양할 만큼 빛나고 아름다웠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영광과 치욕, 빛과 어둠이 반복되었던 것이 그의 삶이었다. 골리앗을 물리친 것도, 사울 왕의 사위가 된 것도, 그러다가 급전직하하여 그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유랑하게 된 모든 운명을 그는 받아들이고 껴안았던 것이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원수의 목전에서도’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자기를 따르리라는 확신으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 그런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사람마다 찢어버리고 싶은 운명이, 과거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그 ‘찢어버리고 싶은 운명’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그의 현재나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내 운명에 얼룩처럼 묻어있는 부끄러움, 실패, 어두움을 사랑까지 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적어도 담담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웃음치료 강사초청 강연

2. 까르페 디엠(Carpe diem) - 하나님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인생의 시간은 우리를 시기하며 흔든다네
   오늘을 살게, 미래에 대한 기대는 최소한으로 하고"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송시 한 구절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까르페 디엠’이란 말이 나왔다.  현재를 붙잡아라, 오늘을 살아라, 그 순간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현재를 희생한다고 미래가 반드시 가치 있어지는 것은 아니며 ‘미래의 나’도 ‘나’이지만 ‘오늘의 나’도 ‘나’라는 것이다. 이 말을 ‘개처럼 살라’고 번역한 사람도 있다. 나는 개를 싫어하지만, 개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집중을 안다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 주인과 놀 때의 개를 생각해 보라. 오직 그 행위에만 집중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뜻밖에도 커피 이야기와 함께 듣게 되었다.

우선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가운데 가장 커피를 좋아했던 분은 돌아가신 전교조 위원장 윤영규 선생이다. 그 분은 나중에 커피 때문에 손에 수전증이 올 정도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분은 어떤 커피든지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커피의 종류가 문제가 아니라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며칠 전, 라디오에서 우연히 이 커피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되었다. 이제 중년을 넘어서는 나이의 여자가 보낸 사연이었다.

어린 시절, 안방의 다락에 커피가 있었고 그 안방에는 언제나 할머니가 계셨다. 마치 다락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당시 며느리였던 어머니는 커피를 좋아하셔서 가끔 어린 자신에게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는 것이다. 할머니께 밖에 놀러 가자고 해. 손주의 청을 마다할 리 없는 할머니와 자신이 동네 어귀를 산보하게 되면 어머니는 다락에 올라가 커피를 덜어내올 수 있었다. 어린 자신이 마셔도 그 커피는 맛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 어머니가 치매가 심해지고 임종이 가까워 요양원에 계실 때, 그 요양원 자판기에서 함께 마셨던 커피도 맛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연의 요지는 이것이었다. 모든 커피는 맛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시절은 그 시절 나름으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노래한 전도서 기자는 그 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리고 12;1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리 하라는 것이다. 청년의 때, 지금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때는, 예비하신 모든 시간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지금 붙잡으라는 것이다. 지금 그 아름다움을 누리고 살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몸매와 피부를 가진 여자가 목욕을 할 때마다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이 아름다운 몸이 늙어가는 것을 한탄했다는 것이다. 애 터진 이야기 아닌가. 그렇게 한탄할 시간에 그 때까지의 아름다움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주름이 생기고 뱃살이 늘어나도 그것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케세라 세라’가 아니라는 것이 전도서의 고백인 것이다.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기억할 것은 바로 오늘은 오늘 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봉사활동 중인 여수중부교회 남선교회 회원들

3.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서 ‘지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당연히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로마 시대, 장군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개선식을 할 때, 그 곁에 노예가 함께 타고 그 영광스러운 개선식 동안 끊임없이 주인의 귀에 속삭인다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 정확한 번역인데 나는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까불지 마 임마.

삶의 그 어떤 영광이나 비참, 기쁨이나 슬픔도 삼켜버리는 블랙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죽음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삶은, 오늘은, ‘우리 같이 있을 동안’은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다.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죽음을 넘어 그 다음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 같이 있을 동안’이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고 슬퍼하거나 애달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까르페 디엠, 지금 있는 ‘우리 같이 있는 동안’을 붙잡으면서 동시에 메멘토 모리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라는 것이다.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부모나 자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도 있을 것이다. 여기 있는 분들처럼 수십 년을, 거의 평생을 한 교회의 지붕 아래서 살았던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동행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설령 ‘웬수’같을지라도, 그것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라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 -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너무 간단하다. 더욱 사랑하고, 더욱 자주 만나며, 더 가까이 다가가라는 것이다. 마주치는 그 손끝이 떨리지 않아도 좋다.

황지우의 ‘늙어가는 아내에게’라는 시 한 부분이다.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이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어가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목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우리 같이 있는 동안에 -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몇 달 허리가 아프면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같이 허리가 아픈 사람, 아파 보았던 사람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설픈 의사와 상담하는 것보다 시간이 잘 가고, 심지어는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허리는 아닐지라도 여러분은 아픈 곳이 없는 사람일까. 아니지 않는가. 아픔만이 아니다. 기쁨이나 슬픔까지, 때로는 지난날의 부끄러웠던 일이나 어두움까지 함께 나누면 얼마든지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같이 있는 동안,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 수 있도록 힘을 더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맨 우측이 최연석 목사, 최근 지리산 김경남 목사네 방문하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