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프랑스의 법관이자 미식가인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의 “미식예찬”(원제,‘미각의 생리학’, Physiologie du goût)은 미식 담론의 ‘경전’이라 불리는 책입니다.

프랑스인은 음식에 관심이 많고 프랑스 음식은 세계 미식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은 그의 “미식예찬”에서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부드러운 치즈 이야기에는 한가로이 혀끝으로 맛을 음미하는 향락주의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는 “사람이 먹는 것이 곧 사람이다”라는 문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독일어의‘먹다’라는 동사와 ‘~이다,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의 발음이 같은 데서 비롯된 말장난이 흥미롭게도 무거운 철학적 명제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의 내적 본성을 외부로 투사 한 것이라고 하여 신은 결국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몇 주 전 20년 만에 한국을 방문 하였습니다. 이곳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한국의 이런 저런 소식을 접하다 보면 대한민국만큼 음식에 관심이 많은 국민도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음식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이 프랑스인을 앞지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한국을 방문하여 그 화려한 음식문화는 접해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빡빡한 일정 때문에 미식(美食)에 할애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누구나 미식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뿐 아니라 모든 현대인의 음식에 대한 관심은 인간 존재의 정체성마저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브리야 사바랭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음식에 대한 관심이 인간의 존재방식을 바꾸어 놓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음식만큼 총체적 인간 삶과 문화에 영향을 끼친 것은 없습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생활이 윤택해질수록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선택이 무의식 가운데 인간 존재의 지배적 방식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인육을 먹는 어떤 사회에서부터 한 끼에 수 천 달러를 지불하는 특별한 식사와 각별한 정성과 의례가 요구되는 예식 음식에는 인간의 정신적 지향과 상징체계와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드러내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살찐 것은 부의 상징이었지만 지금 미국의 경우에서는 서민의 상징입니다. 어떤 음식은 특별한 종교와 문화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조롱과 증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중세 영국인은 돼지고기를 유대인의 코끝에 갔다 대는 것으로 유대인을 조롱하였다고 합니다. 문화상대주의가 지배적인 현대 사회에서 싫어하는 음식을 강요하는 것이나 특별한 음식을 혐오하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 자체를 모독하는 경우도 결국 음식이 인간 존재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절대빈곤의 시대에도 음식은 단순히 굶주림을 채우는 물질만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는 염치와 예의와 체면과 음식을 대접하는 집안 식솔들에 대한 배려와 효도, 나아가서는 가난한 이웃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와 태도는 인간 존재의 매우 중요한 한 형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음식이 환경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육식 탐닉이 환경오염의 중대한 한 원인이 된다는 사실은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의 원료인 식량이 국제 관계에서 무기화 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 정책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식량 즉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먹을 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의 형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형식이 인간 사회에서 정글의 법칙대로 작동되지 않고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 것은 인간 이성과 법과 도덕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통제가 느슨해지거나 무시되면 인간은 이성 없는 짐승보다 더 극심하게 힘의 논리를 정당화 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존재방식이 본래 폭력적이라고 합니다. 강한 짐승이 약한 짐승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존의 질서이지만 인간이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인간을 해하거나 죽이는 것은 악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생존이나 이익을 위해 다른 인간의 것을 폭력이나 속임수를 이용하여 빼앗거나 취하는 것은 문명사회에서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폭력과 속임수가 지능화 되고 때로는 합법화되기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늘어나게 되지만 정작 가해자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인들은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너그러운 태도 같지만 그런 태도는 생존을 위해 낚시를 하는 사람보다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식물을 인간에게 식물로 주셨지만 그 동식물을 과도한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한 재미로 낚시를 하는 것까지 허용하셨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낚시한 물고기는 놓아주고 시장에서 생선을 사먹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모르는 물고기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예리하게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는 존재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외면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나로 인해 타인이 당하는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 국가나 교회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비윤리적인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적극적으로 정당화 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페스탈로치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세 유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는 자연적 존재방식, 둘째는 사회적 존재방식, 셋째는 도덕적 존재 방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 사회적 존재방식은 동물적 이기심이 유지되면서 동물적 야만(?)과 도덕적 이상 사이에서 취하는 존재방식임으로 위선적이고, 또한 언제든지 동물적 상태로 추락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철학적으로는 이성에 의해서, 기독교적으로는 성령에 의해서 통제 되지 않고는 만물의 영장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흔히 성령과 이성의 관계를 마치 배타적 관계로 오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만 인간 이성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한 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이성을 초월하지만 비이성적이면서 성령 충만하다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것은 성령에 대한 심각한 왜곡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합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보며 모든 사물은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그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불안이라는 정서에서 이해합니다. 그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끓임 없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 이해를 위한 토대를 성경 계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파악한 ‘실존’에 두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방식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 부정하는 무신론,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이 있습니다. 무신론과 불가지론에 대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들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 따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엉뚱한 신을 만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신학은 이 세계가 아름답고 또한 합리적이며 완전한 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현명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주론적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들은 자연과 인과관계를 계속 추적해 가면 제1원인인 신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존재론적 설명은, 인간은 불완전하고 신과 인간은 상호 관련이 있으므로 완전무결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목적론적 설명은 자연이 어디까지나 목적에 적응한 질서를 지니고 있는 이상, 자연 전체의 설계자로서의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도덕적 설명은 우리에게 그 실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도덕 법칙의 원천으로서 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미학적 설명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논리적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서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가장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히 1:1,2).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 곧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따라야 할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성경 계시의 핵심입니다. 이 계시를 지향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방식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거룩하신데 완전함이나 거룩함도 결국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 방식 또한 사랑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사랑이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 모습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