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에 합당한 성품을 가지는 것이다. 마치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 독특한 성품을 가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에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 역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의 성품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근거하여 성막 제의나 규례가 만들어졌다.

1.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갖추어야 할 성품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고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서 찾아지는 본질적인 내용이다. 어떤 행위를 통해 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에 그에 합당한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의 최대의 관심사 역시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본질을 추구하는데 모든 촉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비추어 볼 때 언제나 흠과 모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시편 기자에게 가장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염세적 자기 비판(批判)이나 자기 비하(卑下)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이미 율법에는 그가 가야할 길이 분명하게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 앞에서 미흡함과 부족함을 발견하는 자신의 미약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편 기자는 악인의 길을 혐오한다. 또한 어리석은 자가 도모하는 모든 행사들로부터 자신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의’를 결코 충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이것은 시편 기자로 하여금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나가려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란 고백은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을 깨닫는 의인의 외침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느 곳으로부터도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성전 예배에서 행해지는 제의에서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부인(否認)이다. 이 정신이 가장 잘 나타나는 제의가 바로 제사 제도이다. 제사 제도는 죄의식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으로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서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제도는 인간의 편에서 일정한 형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형식에 따라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인정(認定)과 자기 부인의 과정이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2. 의인이 갖추어야 할 신앙의 정조(貞操)

시편 기자는 자신의 의지만을 앞세워 하나님께 나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기 위해선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고 들어오도록 윤허하실 때에 비로소 그 앞에 나갈 수 있고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과연 자신이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 근본이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에게선 아무런 흠과 티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는 모순도 없고 과장도 없다. 하나님은 그 이름이 증명하시는 것처럼 순전하고 완전하시다. 때문에 이미 죄에 오염되어 있는 인간이 과연 하나님께서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주신다 할지라도 그 앞에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염려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앞섰지만 막상 그 앞에 나간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지 않은 자들은 마치 언제든지 자기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시편 16:2-4의 난해성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학계의 관심사이다. ‘말한다’는 ‘아마르테’(תרמא)를 1인칭 단수의 변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맛소라 사본처럼 2인칭 단수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결코 단순치 않다. 단지 2-4절에 나타난 것처럼 혼합주의 신앙관에 대한 시편 기자의 갈등을 통해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을 의지하거나 그것에게 경배하는 행위를 극단적인 악으로 단정하고 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시 16:4)는 시편 기자의 말은 마치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과 겸하여 다른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는 순전히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여러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자들은 신들로부터 두 배 이상의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참 신만이 주는 것이다. 거짓 신들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우상들은 결코 복을 베풀 수 없다.

시편 기자는 본인의 생각도 그렇겠지만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시 16:2)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혹시 이 말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거짓 신앙을 행하는 자들은 입술로는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하면서도 다른 신들 앞에서도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에 대한 불신이며 혹시라도 다른 신들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일 뿐이다.

시편 기자는 확실한 복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그의 ‘산업’이고 ‘잔’이다(5절). 오로지 이방 신을 부르지 않는 입술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호 2:17). 때문에 시편 기자는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처럼 자기도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세상의 어떤 신들이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세상의 어떤 신이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가? 이 일은 오로지 언약을 제정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전능자 여호와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약속의 땅에 있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얻기까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율법의 행함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율법에 순종함으로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들에게는 이미 약속의 땅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단지 아직 그 땅에 들어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역사라는 과정을 통해 성취된다. 때문에 시간의 과정으로서의 역사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그들은 이미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아 누리고 있는 시편 기자의 눈은 이미 그가 받은 기업 속에서 여호와의 언약 성취를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기업을 누리기 위해선 여전히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시 16:7)는 말속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한 공포에 억눌릴 필요가 없어졌다. 하나님의 거룩한 의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는 시편 기자의 본색이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함으로서 비로소 그는 진정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얻게 된 것이다(10절).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오롯하게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는 정조(貞操)야 말로 의인에게서 찾을 수 있는 독특한 성품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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