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영적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리는 교회

경기도 화성에 있는 비봉열린교회(기성, 박종건 목사 시무)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비봉 IC에서 나와 3분도 걸리지 않는 곳으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았다. 2차선 도로를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좁고 외딴 길로 들어섰다. 좁은 도로 좌우에는 공장과 창고가 있었다. ‘이 곳에 교회가 있을까?’ 생각할 무렵, 눈 앞에 주택을 개조한 작은 교회가 나타났다. ‘비봉열린교회’ 그리고 문 앞에는 이곳은 어린이 예배를 드리고 새 예배당은 뒤편에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안내를 따라 모퉁이를 돌자 아름답게 지어진 비봉교회 새 예배당이 나타났다.

예배당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자 비봉교회의 비전선언문과 사역을 알리는 배너와 스크린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 공동체는 한사람을 전도하여 자유케 하며, 성령 충만한 예배자로 세우며 제자를 삼아 일터 사도로 파송하여 세계복음화를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비봉열린교회 비전선언문)

비전선언문을 통해 담임목사님의 목회를 조금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을 전도하여 자유케 한다...그리고 그들을 제자 삼고 사도로 파송한다’ 담임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 할 무렵 박종건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박종건 목사님의 첫인상은 매우 밝고 활기차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편안함과 자유함도 느껴졌다. 그 편안함에 어색함 없이 인터뷰가 시작됐다.

중 1때의 성령 체험과 뒤늦은 신학대학 입학

박종건 목사는 중학교 1학년 때 칠보산 기도원에서 성령체험을 했다. 교회에서도 포기한 말썽꾸러기 중학생이 학생부 수련회를 통해 강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었다. 수련회로 왔어도 여전히 장난치다가 기도시간에 예상치 못한 성령의 누르심을 체험한 것이다.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며 기도가 이어졌고, 순간 개구쟁이 중학생 입에서 “하나님 제가 목사가 되겠습니다”라는 고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후 신학교로 진로가 이어지지 못했다. 고3 때 실족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졸업하고 꿈 없이 방탕한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7년을 방황하며 몸에 전혀 병명을 알 수 없는 질병을 얻었다. 의사도 알 수 없는 가려움과 고통. 그러는 중에 서서히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이 떠올라 군대를 마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먼저 안양대학교 신학과를 들어갔다. 안양대학교 신학과에서 박 목사는 오직 성경과 기도를 바탕으로 한 보수신앙 훈련을 받고 서울신대를 가게 된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부터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그렇게 입학한 지 8년 만인 30대 초반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학대학을 들어가자마자 고향교회(경기도 사강 신천교회)에서 7년 정도 사역을 하다가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비봉에 목회지가 있는데, 그곳은 아무도 없고 건물도 다 쓰러져가는 교회다. 가겠느냐?”라고 물었다. 노인 성도 몇 분과 어린아이 몇 명 있는 농촌 교회. 주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만류했다. 고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지를 놓고 기도하는데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하나님이 가라는 분명한 확신이 들자 다른 사람들의 걱정소리는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악한 사단의 권세를 끊어라

박종건 목사는 1999년 9월 전도사로 비봉열린교회에 부임을 했다. 비봉열린교회가 있는 비봉면 구포리 일대는 어느 지역보다 복음에 강퍅하였다. 지금까지 다른 3개 교회가 문을 닫았다. 우상숭배로 유명한 땅. 기도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도를 멈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 동네 이장이 방송을 했다. “주민 여러분! 아무개 아들이 교통사고로 위험하오니 병문안 가주시기 바랍니다”

알고 보니 지역의 젊은이들이 여러 사건사고로 갑자기 죽어가고 있었고, 젊은이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그때부터 박종건 목사는 시급한 사역을 알게 깨달았다. 그것은 “악한 영들과 영적 전쟁”이었다. 3년 간 오직 기도에 전념하며 기도의 동역자를 붙여주시길 함께 기도했다.

하지만 악한 영들의 영적인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교회 한 학생이 울며 박 목사에게 달려왔다. 엄마를 살려 달라는 것이다. 엄마가 제초제를 먹어 응급실에 실려 간 것이다. 상태가 매우 심했다. 병원에서는 살 가망이 없으니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고, 한편에서는 가족들도 장례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박 목사는 사랑하는 교회 학생의 엄마를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중학생 아이의 우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창자가 끊어지는 기도가 무엇인지 그 때 느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매달렸다. 사흘 나흘 환자의 상태가 더 심각해지지 않자 병원에서 전체적인 검사를 다시 했다. 놀랍게도 농약 성분이 하나도 검출되지 않았다. 결국 얼마 후 회복되어 퇴원을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애 엄마, 저기 목사님이 얼마나 기도한 줄 알어? 다른 건 몰라도 그거는 잊지 말아야 돼" 그 일로 그 학생의 엄마가 교회에 나왔고, 지금은 집사가 되어 주님의 충성된 일꾼으로 쓰여지고 있다.

어느 주일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교회 유치부 아이가 교회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서 트럭이 나타나 마당에 앉아있던 남자 아이를 친 것이다. 트럭 앞바퀴가 아이의 흉부를 타고 올랐다. 예배를 마치고 나온 성도들 모두 그 광경을 보고 기절초풍을 했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아이와 병원으로 달렸다. ‘아, 나는 여기서 목회 끝이다’ 그때도 오직 기도밖에 없었다. 얼마 동안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결과를 말했다. ‘타박상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골절도 아니고 타박상이라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적인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박 목사는 점점 승리에 대한 확신이 강해졌다. 박 목사는 그들에게 ‘제자훈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말씀을 가르쳐도 변화되지 않고 냉랭한 상태가 이어졌다. 어느 날 박 목사는 성도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말씀을 배워도 이렇게 변화가 없는데, 무슨 문제인지 기도해봅시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회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한 아이가 경련을 일으켰다 귀신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밤새도록 귀신이 그 안에서 지껄였다. 또 그 동생도 귀신이 들어가 발작을 일으키는데 7명이 붙잡아도 어린 학생을 제어할 수 없었다.

박 목사는 이것이 영적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악령이 역사하니 말씀이 들어가 역사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악한 영들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대적하는 체험들을 통해, 귀신들이 쫓기고, 질병이 치유되는 목회의 능력이 나타났다.

교회 건축의 기초가 된 정봉용 성도

박 목사가 잊을 수 없는 독거노인 ‘정봉용’ 할머니 성도님. 박 목사는 어디를 가서도 “나를 목사 만든 일등공신 중 한 명은 바로 ‘정봉용 성도’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박 목사를 진짜 목사로 만든 분. 비봉열린교회 새성전 2층 본당은 ‘봉용홀’이다. 젊은 날에 몇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잃고 마지막에 낳은 아들을 죽게 할 수 없어, 절에 들어가 자라게 했다. 그 아이가 자라서 훗날 유명한 스님이 된다. 불교계에서 실력 있는 주지로 활동할 무렵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고 많은 보상을 받게 된다. 혈육이라고는 어머니밖에 없었지만, 보상금으로 나온 돈을 먼 친척 조카에게 맡기게 된다. 하지만 거액의 보상금을 모두 빼앗기고 남은 빌라 한 채와 땅이 조금 있었다. 그것마저 빼앗길 수 없던 정봉용 성도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교회에 봉헌하겠으니, 등기이전을 해달라고 간곡히 매달려 몇 번을 만류하다가 등기이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치매가 오자 동네를 돌아다니며 헛소문을 퍼뜨렸다. ‘목사가 때렸다’ ‘목사가 내 재산을 빼앗았다’ 그러다가 제정신이 돌아오면 괜찮아졌다. 홀로 사는 독거노인에 소변을 조절하지 못하는 몸이어서 어디를 가든지 악취가 심했다. 그분이 교회를 오면 시궁창 냄새가 날 정도였다. 성도들이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 냄새가 향기처럼 느껴지게 해 주세요”

재산을 빼앗은 목사라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싶지 않았다. 돌려주면 떳떳하고 편할 것 같았다. 돌려주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법무사 장로님을 만났다. 박 목사가 자신의 고민을 말했더니 그 장로님이 말하기를 “목사님, 목사님 그런 오해들에 떳떳하시죠?” “네, 그럼요” “목사님, 그렇다면 목사님 편하자고 하나님 재산을 포기한다고요?”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그때부터 주변 눈치를 보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국가에서 정봉용 성도를 요양시설로 강제로 입양시켰다. 독거노인을 위한 당연한 조치였다. 떠나는 날 새벽 정봉용 성도가 교회에 나와 3시간 넘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 진짜 목사님 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 복주세요. 능력 주세요.” 그렇게 요양시설로 떠나셨다.

‘정봉용 성도’를 사랑으로 보듬은 그 오랜 시간들. 수 없이 차에 태우며 병원이며, 여기저기 모시고 다닌 일들. 찾아가 심방을 하고 기도하고 함께 한 일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박 목사를 참 목사로 만드신 것이다. ‘정봉용 성도’의 봉헌은 오늘날 비봉열린 교회의 기초가 되고, 박종건 목사의 목회 밑돌이 된 것이다.

부흥을 위해 예비하신 뜻 밖의 만남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다. 그분이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도 예측할 수 없다. 그 만남 속에 하나님인 장래의 큰 일을 숨겨 두신다. 정봉용 성도를 태우고 병원을 다니던 어느 날 병원에서 20년 만에 지인을 만났다. 20년 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초췌했다.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 만남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시렵니까?’ 그러자 그 지인의 현재 상태가 영의 눈으로 보였다. 그 사람이 거의 늘 밤마다 ‘고양이 꿈’에 시달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그 사람에게 “고양이 악몽을 꾸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깜짝 놀라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던 비밀 같은 꿈 이야기를 정확히 맞춘 것이다. 그 지인은 아내가 알코올 중독으로 가정까지 위태한 상태에 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 날의 만남을 끝나고 한 동안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례식장에서 또 우연히 그 지인을 만났다. 조문객들과 어울려 화투를 치고 있던 모습을 보자 박 목사가 말했다. “지금 당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 말이 충격이었던지, 가정이 깨어지기 직전의 지인이 수요일 아침 알코올 중독의 아내를 데리고 왔다. 깡마른 체구에 몸에서는 술냄새가 풍겼다. 바로 그 날이 본격적인 사역의 출발점과 같은 날이 될 줄 상상도 못 하였다. 박 목사가 기도하기 위해 그 아내에게 손을 대는 순간 갑자기 뒤로 나가떨어지더니 토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 아내가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들은 것이다.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지난날의 모든 아픔이 사라지면서, 위로받지 못했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한 것이다. 그 후 하나님은 그 남편도 만지시며 고쳐나가셨다.

결국 이 만남은 오늘날 비봉열린교회 부흥의 주역이며, 박 목사의 든든한 동역자인 김은중 장로와 원영미 권사를 세우신 사건이 된 것이다.

어디를 내놓아도 분명한 예수님의 제자들

여러 가지 신앙의 연단을 거치며 어려움들을 이겨나가자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세워져 갔으며, 특히 김은중 장로와 같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전도는 역사하는 힘이 컸다. 그들의 변화된 삶 자체가 가장 분명한 전도였다.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도 하나 둘 교회에 등록을 했다.

박 목사는 “제자는 또 다른 제자를 낳는 것이 참 제자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비봉열린교회의 제자화 과정을 통해 길러진 성도들은 그야말로 작은 선교사이다. 어디를 가도 복음의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고 다른 제자들을 양육할 수 있는 사역자들이 많다.

비봉열린교회의 성도들 중 상당수는 멀리서 찾아온다. 차를 타고 30~40분 되는 거리에서 마다하지 않고 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취재를 위해 처음 교회를 찾았을 때는 ‘아니 어떻게 이곳에 이런 교회가?’라고 의아했던 생각이 풀어졌다. ‘그렇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교회는 어디서든 기쁘게 받으시는구나’

박 목사는 자기의 체험이 자기 자랑이나 교만이 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그는 소위 교회가 어렵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일하시고, 그런 교회와 목회자의 사역과 순종하는 성도들 속에 성령의 강한 임재가 이어지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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