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역임. 도서출판 교회와성경 편집인 https://www.facebook.com/ChurchAndBible

아담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에 오염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죽음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창 2:17). 여기에서 ‘죄’란 여호와의 말씀, 즉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인간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언약을 파기한 행위를 가리킨다. 최초의 죄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아담이 먹음으로써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1. 시편 기자의 인간관

아담의 범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책으로부터 아담이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창 3:15). 이것을 원시 복음(原始 福音)이라고 한다. 이 시원적(始原的)인 복음은 하나님과 죄있는 아담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언약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언약을 역사 속에서 스스로 성취하시는 분으로 그의 인자하심(דסח)을 나타내셨는데 이 역사가 바로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이다.

따라서 구속사에는 언약의 성취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분명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이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여전히 여호와의 구속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죄 있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긍휼로 주어진 것이다. 때문에 죄 있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긍휼에 힘입어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인생을 가리켜 시편에서는 ‘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는 시편 기자의 선포는 이와 같은 사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복 있는 사람’은 본래부터 죄가 전혀 없는 순결한 사람이 아니다. 비록 죄가 있을지라도 죄의 용서를 받은 자가 바로 복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인간을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 자신도 바로 그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나아가 ‘복 있는 사람’이란 용어는 자신이 스스로 죄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긍휼에 따라 허물(עשׁפ)과 죄(האתח)와 악(ןוע)을 탕감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은혜를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여호와의 은혜를 거부할 능력조차 가지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이 ‘복 있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적합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이로써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한다. 경외심은 일종의 거룩한 두려움(angst)이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무능하고 무력한 자신을 발견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 가지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 죄악을 숨기려 한다. 겉으로는 결백하고 순결한 것처럼 가장(假裝)한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결코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죄악을 위장하려 한다. 이것은 절대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간사한 태도이다. 죄악을 품지 않은 것처럼 끝까지 위선으로 위장한 인간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런 인간의 상태는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 없다. 마치 썩어 냄새가 나는 생선에 향수를 뿌린 것과 같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향수 냄새 대신 썩은 냄새가 진동할 것을 알면서도 그와같이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죄 있는 인간의 속성이다.

2. 불가항력적인 여호와의 은혜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은 더욱 깊은 죄의식만 가져올 뿐이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는 고백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시 32:4) 하는 여호와의 강권적인 은혜주심의 결과이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신다. 단지 아직도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그 저항이 크면 클수록 뼈가 마르는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전적으로 여호와를 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 32:5)는 고백은 여호와께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한 의인의 복된 신음 소리이다. 마치 여호와의 긍휼을 피하기 위해 온갖 방호벽을 쌓으며 저항했지만 결국에는 그 앞에 굴복한 패잔병과 같다. 그러나 그 상태가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죄 있는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6절).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불가항력적인 은혜 속에서 비로소 은신처를 발견한다. 세상의 어떤 환란이나 고통이라 할지라도, 죄 있는 인간을 찾아오신 여호와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복 있는 사람’의 길을 친히 가르쳐 보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란 선포는 홍수가 범람하는 이 세상의 위기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말씀 사역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 사역은 의인의 길을 비추어 주는 등불과 같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는 선언과 같이 토라(הרות, 율법)로부터 참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여호와의 말씀에서 벗어나 진리와 지혜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9절). 이 율법으로부터 구원의 참 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여호와께서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악인은 이 사실을 끝까지 거부한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마저도 부인하려드는 그 행위가 바로 죄악이다. 악인은 스스로 악인의 꾀를 좇으며 죄인의 길에 떠나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시 1:1). 때문에 그에게는 여호와의 긍휼을 저항하는 고통만 있을 뿐이다(3절). 그 고통으로 인해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에 남아 있는 호흡을 몰아쉬며 여호와의 은혜에 대하여 단발마와 같은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 악인의 실상이다. 겉으로는 스스로 강하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뼈가 녹아 내리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상태가 바로 악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여호와의 은혜에 굴복한 의인은 끊임없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훈계를 받으며 여호와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게 된다(8절). 여기에 바로 여호와의 인자하심(דסח)이 발휘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죄 있는 인간을 부르시어 복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그에게 끊임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참 생명의 길을 가게 한다. 이것은 한 개인의 인생사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발휘된다. 때문에 여호와의 인자하심 안에 있다는 것은 끝까지 그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여호와의 역동적인 은혜 가운데 있음을 의미한다. 의인과 그 회중은 여기로부터 동력을 얻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구속이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구속에 참여한 모든 회중들에게 여호와를 찬송할 것을 선포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이것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굴복한 의인들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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