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4: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역임. 도서출판 교회와성경 편집인 https://www.facebook.com/ChurchAndBible

시작하는 말

빌립보서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는 말씀에서 제시된 것처럼 하늘나라의 시민인 성도들이 사랑 안에서 희생과 봉사로 하나가 되며 서로 기뻐하고 그 안에서 평강을 누리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그들의 현재적 고난들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고난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지지되고 있다고 말할 때에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주어진 도우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부활하시고 높이 올리운 주이신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시기 때문이다(행 2:33).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빌 1:19)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I. Howard Marshall, 신약성서신학, p. 437).

그리스도와 성령의 연합을 비롯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합,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은 전적으로 성도들이 복음의 합당한 삶을 통해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 서로 하나가 되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평강을 누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에까지 자라가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빌 2:1-4).

결국 교회는 성령에 의해 발생된 천국 시민들로 구성된 공동체로서(빌 3:20) 함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함으로써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는 말씀을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존재이다.

1. 평강의 실체로 나타나는 교회(빌 4:8)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한 가르침으로 교회가 누리는 평강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이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써 교회가 누리는 평강의 성격과 관련해 높은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교회가 누리는 기쁨의 이유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빌 4:7) 이 평강은 교회의 특성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야 하며, 그들로부터 평강의 실체로서 교회를 인식하고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누리는 평강은 온 땅에 궁극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하나님의 평강이기 때문이다(빌 4:9).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11)고 하는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가 성취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빌립보서 4장 8-9절은 한 문장으로 두 개의 주동사에 의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요약해 주고 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λογιζσθε)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πρασσετε)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8-9). 여기에서 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할 것인가와 관련해 고도의 수사학적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생각하라’(λογιζσθε)는 동사의 목적어로 등장하는 두 개의 명사는 아레테(αρετη)와 에파이노스(επαινος)로 ‘도덕적 탁월함이나 선함’과 ‘사람들로 받는 칭송’을 지시하고 있다(개역 성경은 ‘덕’과 ‘기림’으로 각각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아레테’(αρετη)는 스토아 철학에서 인간의 최고선, 즉 인간이 자신을 헌신해야 할 유일한 목적을 지시한다. 또한 ‘에파이노스’(επαινος)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가치를 의미한다. 이 두 단어들은 빌립보 성도들이 회심하기 이전에 살았던 이교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던 삶을 회고하게 만든다.

바울이 이 단어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성도들이 예전에 최상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던 그 덕목들이 지금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에 의해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이것들, 즉 ‘덕’과 ‘기림’은 이교도들에게 있어서 성도들이 살아가는 교회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여하는 의미 있는 삶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의 기준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 무엇이든지 칭찬할 만한 것’ 등이다(김세윤, 빌립보서 강해, p. 171-172).

바울은 이 목록들을 가리켜 거기에 ‘덕과 칭찬할 만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개역 성경은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로 번역)고 지적하고 성도들이 이 미덕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2. 교회가 누리는 평강의 속성(빌 4:9)

바울이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한 것은 이 미덕들에 대해 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하거나 아니면 이 미덕들에 대해 성도들로 하여금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 미덕들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평가함으로써 궁극적인 선한 행위를 ‘행하기’ 위해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말은 9절에 의해 잠정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비록 자연적 도덕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8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덕목들은 9절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πρασσετε)’는 말은 최상의 자연적 미덕들을 제한하면서 이러한 행함이야말로 교회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강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가 행할 것으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네 가지로 자신에게서 ① 배우고, ② 받고, ③ 듣고, ④ 본 것으로 이 안에는 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미덕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8절의 미덕은 자연 상태에서 세속적 기준이 아닌 바울에 의해 재평가됨으로써 새롭게 해석된 미덕들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① 첫째로 빌립보 교회가 실천해야 할 것은 바울에게서 배운 것이어야 한다.
배우다(εμαθετε)는 말은 충성스럽게 고수하고 확고하게 지키며 그들의 삶이 배운 것들에 의해 지배되고 변화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 빌립보 교회는 세속적인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직접 가르쳤고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배웠던 특별한 내용들을 실천해야 한다.

② 두 번째는 바울에게서 받은 것이어야 한다.
받는다(παρελαβετε)는 말은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목적으로 교회의 전통(the traditions of Church)을 받아들인다는 전문적 용어이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계시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의 깊게 전달된 신앙 고백의 내용들(고전 15:1-8)이 빌립보 교회에 전승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이로써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전통의 사슬’(the chain of traditions)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서 받은 것을 믿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뿐 아니라 그 전승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 깊게 전달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③ 세 번째는 바울에게서 들은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듣는다(ηκουσατε)는 말은 바울의 설교나 가르침 혹은 바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보다는 바울을 특징지어 주는 내용들로서 바울의 사람됨, 바울이 하는 일,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 바울이 겪은 일 등에 대하여 들은 것을 의미한다(Gerald F. Hawthorne, 빌립보서, p. 356).

이것은 다음에 등장하는 ‘내 안에서 본 것’에서 확인된다.

④ 네 번째는 바울에게서 본 것(ειδετε εν εμοι)이어야 한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가 내게서 본 것’으로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배우고 받고 들었던 성도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삶 가운데서 나타낼 수 있는가에 대해 그것들을 자신이 친히 모범을 보임으로써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전파한 말과 삶의 모습이 언제나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을 중요시하였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삶으로써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가 행동과 유리된 고상한 말로 표현되어서는 안 되며 항상 교사의 삶 속에서 그 내용들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친히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즉 바울에게서 ① 배운 것과 ② 받은 것과 ③ 들은 것과 ④ 본 것들을 통해 성도들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그들이 당면한 두려움과 걱정과 불안과 같은 자신들의 마음을 괴롭혔던 걱정과 염려들이 제거될 것이라고 바울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마치는 말

빌립보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평강이 교회가 누리는 기쁨의 원인임을 밝힌 바 있다. 여기 9절에서는 그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자신이 평강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함으로써 7절에 비해 훨씬 진보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김세윤, 빌립보서 강해, p. 176).

여기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평강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고난 가운데서도 교회가 즐거워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강이신 하나님 자신이 교회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진정 고난 가운데서도 교회가 평강을 누리게 되는 위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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