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17)-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소록도(小鹿島). 소록도는 한센인들의 아픔이 서린 작고(4.42㎢) 아름다운 섬이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 하여 소록도라고도 불리기도 하였다는 설과, 일설에는 원래 녹동항 인근에 녹도(鹿島)가 있었는데 그 옆에 작은 섬이 있어 소록도라 불리었다는 말로도 전해진다. 녹도는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되었다.

필자는 우리 집 아이들이 동․하계마다 떠나는 소록도 봉사엘 몇 번인가 연속해서 따라다녔다. 〈나눔과 실천〉이라는 단체였는데, 남무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봉사의 힘(유익성)과 인성교육을 기르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소록도 봉사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매일 새벽기도회 가는 것은 기본이다. 오전, 오후 서너 시간을 한센인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봉사의 처음이고 끝이다. 혼자 사는 집은 독신사(獨身舍)라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 집은 가정사(家庭舍)라 부른다. 조장 중심으로 3-4명씩 짝을 지어 가가호호 순서에 따라 방문하는데, 주변 환경은 맑고 깨끗하지만 가정집은 대체로 낡아 누추한 냄새가 조금씩 난다. 겉모습은 전혀 티가 안나는 분으로부터 손발은 물론 다리까지 떨어지고 뭉그러진 분들도 있다. 요즘엔 더러 알코올 중독자이나 우울증 환우들이 들어와 살기도 한다.

 

(1) 사역기간 내내 하루 8시간씩 가정을 방문하여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것이 제일 중요한 봉사다. 나는 설교하는 심방은 해보았어도 들어주는 심방은 거기서가 처음이다. 매우 낯설었지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청년들이랑 함께 조편성이 되므로 목사도 일개 봉사자일 뿐이다. 조장의 명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① 병색이 깊어 실명한 노부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오래전 실명했고 할머니도 눈이 어두워졌는데 우리 아이들이 들어가면 반가워한다. 할머니는 손으로 잡고도 무슨 물건인지 모르기에 혀에 대 보고서야 무엇인지 안다. 집안의 살림을 옮기는 시간이다. ‘선반에 올려라’, ‘장롱에 넣어라’고 부탁한다. 때로는 쓸고 닦는 일도, 빗자루 질을 요청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한 달 가까이 목욕하지 못했다며 목욕을 시켜 달라 한다. 순간 당황했는데 우리 조장, 가정방문을 마치는 점심시간에 자기가 혼자서 하겠다며 자원한다. 어떤 가정에서는 휠체어를 몰고 산책을 나가 달라는 이도 있다. 모두 다 손쉬워 보이지만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것이 없다. 소록도의 주민들도 고령자들이 많다. 자녀들은 육지에 나가 산다. 명절이 되면 고향에 내려와 그리던 부모님을 만난다. 여느 섬 모습과 다르지 않다. 국립소록도병원은 1917년에 완공되어 40년대에는 6천여 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500명이 채 안 된다. 어느덧 100년의 역사를 지닌다.

이청준 선생의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소록도가 무대이다. 대개는 병원장이 소록도를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대개 일본인이었고 군인인 경우가 많았다. 소록도 사람들은 한센인들이었지만 강제노동에 불려 나가기 일쑤였다. 간척사업에 투입되기도 했다. 공사가 끝나면 가정마다 땅을 불하해 준다고 속여 노역을 시켰다. 그런데 모두가 허사였다. 병원장이 그리는 천국을 만들기 우해 동원될 뿐이었다. 그래서 책 제목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당시 수용되었던 수천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역사의 질곡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강제노역의 잔재가 지금은 시간으로 남아있다. 새벽기도를 3:50분에 시작하고, 4:20분이면 끝나는데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왜 기도하지 않고 교회당을 빠져나갈까 물은 적이 있는데 새벽 4:30에 식사 배식이 나온다는 것이다. 해서 소록도 교우들은 새벽 2시 30분 정도면 교회당에 불을 켜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한 켠에는 성가 연습을 하고 새벽예배마다 찬양을 한다. 점심식사는 10:30분에, 저녁식사는 4:30분에 이뤄진다. 필자는 생각한다. 소록도의 시계는 육지보다 두 시간이 빠르다고... 이것이 강제노역의 잔재다. 평생의 습관이 되었기에 바꿀 생각도 없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매우 부지런하다. 따뜻하며 주민들끼리 단합이 잘 된다. 소록도의 리더는 아직까지 교회의 장로들이 맡아하고 있었다.

소록도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켜 한센인들은 세 번 죽는다고 말한다. 섬에 수용되어 갇히면 그것이 한번 죽는 것이요, 사망하면 한센씨병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시신을 해부했기에 두 번 죽는다 했으며, 해부하고 나면 화장을 시키므로 세 번 죽는다고 말해왔다. 수용된 사람들끼리 남녀가 사랑하고 결혼하고자 하면 아이들에게 병이 유전된다 하여 단종대에 올려 강제로 거세를 시켰다. 자녀들을 낳지 못하도록 말이다. 필자가 봉사 갔던 그 기간에도 단종수술의 희생을 당한 이들이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었기에 법원에 나가 증인으로 선다고 함께 가자면서 마을에 방송을 하고 있었다. 단종 수술대도, 시신 해부대도, 감옥도 모두 소록도 기념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암울했던 소록도의 흔적들이다.

② 한 가톨릭 신자 부부의 가정을 방문하였다. “선생님 ‘쇠좆매’라는 것을 아십니까? 저는 여기서 사는 게 싫어 친구와 함께 야밤에 바다를 건너 탈출하다가 붙잡혔는데 ‘쇠좆매’로 수십 대를 맞았습니다.” 친구는 다음날 아침 해변가에 시신으로 떠밀렸고, 붙잡혀 온 자신은 쇠좆매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쇠좆매란 황소의 거시기(성기)를 말려 일본인들이 고문 도구로 사용하던 것으로, 평소 뻣뻣하던 그것을 물에 담그면 부들부들하게 되는데 그것으로 매질하고 고문을 시켰다는 것이다. 고통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이대로 그냥 죽었으면 싶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겉으로는 매질한 표시가 나지 않지만 속은 고스란히 골병이 든다는 것이다. 수개월간의 고통을 이기고 견디었다.

때마침 들어온 지금의 아내를 성당에서 만나 신부님의 주선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소록도에선 아이를 낳은 수 없었기에 신부님께서 힘써주어 육지에 나가 아이들 낳고 40여 년 살다가 7, 8년 전에 이곳에 다시 들어왔다는 것이다. 부부가 모두 건강해 보이고(?) 예뻤고, 사랑하며 사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사연이 많으니 할 말씀도 많다.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끝나지 않을 사연이었다. 필자가 막내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용돈까지 주신다.

“지금은 살만합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부족함이 없습니다. 많은 혜택을 누리니 말이지요.” 수도 전기 등은 기본이고 생활의 거의 전부를 국가가 지원해준다. 지체가 부자유한 어르신들은 신청을 하면 전동휠체어까지 반값에 살 수 있다. 시설생활인은 물론 다수의 주민들도 감사를 노래한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지금은 정말로 천국이라고...

 

(2) 봉사자들은 거리에서나 마을에서 어르신들을 마주하면 큰 소리로 인사하는 것이 예의라고 훈련받는다. 누구를 대하든지... 큰 소리로 인사함이... 《나눔과 실천》의 기본예절이다. 좋은 발상이다. 나도 크게 인사하는 법을 거기서 다시금 배웠다.

“안녕하세요. 나눔과 실천에서 왔습니다.”(톤을 높인 채 큰 소리로 90도 허리를 굽혀서...) “엉, 그래~!” “청년, 학생들이 수고가 많구먼, 한데 이분은 누구신가, 나이가 좀 들어 보여?” 필자가 학생들 틈에 끼여 있으니 하는 소리다.

③ ‘키 큰 할머니’(우리들은 그리 부른다)를 만났다. 복도를 거닐면서 한 가정씩 방문하던 때였다. 나이가 80은 넘어 보인다. 지나가는 우리들을 붙잡고는 수고들이 많다고 칭찬을 하시더니 지난해에 하던 말씀을 그대로 쏟아낸다. 할 수 없어 할머니 집으로 모시고 들어갔다. “한데 말이야 내가 할 말이 있거든....?” 할머니는 옛날을 회상하면서..., 13살에 몹쓸 병에 걸려서 3년간 움막에 가두어졌다가 16살에 이곳에 끌려왔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가 무지해서 그랬어. 서울에 가서 알약 사다가 먹였으면 6개월이면 나을 것을, 아버지가 무식해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거야. 소학교 시절 일본인 담임선생님(여성으로 기억)이 자신의 손등을 검사하던 중 증세가 이상하다면서 내일부터 학교에 오지 말라는 거야. 집에서 몇 달 있자니까 점점 더 몸에 번져나갔지.”

80이 넘은 이 할머니, 할머니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아직도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다.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말이다. 부모가 무식해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분이 일었고, 원망과 울화가 치밀어 오른단다. 그 할머니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아직까지도 그것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감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감사한 맘도 있지만 부모에 대한 억울을 가지는 양가감정의 소유자였다. 이 할머니는 감사에 실패하고 있었다.

④ 할머니를 뒤로 하고 다른 방에 들어갔다. 원숙 이모 방이다. 아이들이 모두 그렇게 부른다. 매번 들어갈 때마다 원숙 이모는 예쁜 모습으로 다소곳하게 앉아있다. 늘 그랬다. 그날은 등이 뻐근하다면서 아이들에게 두드려달라고 한다. 차례대로 한 번씩 두드리다가, 이를 눈여겨보던 내가 나섰다. 안마는 내가 잘한다면서. 그녀가 무릎에 덮었던 담요를 거두었는데 무릎 아래 종아리가 없다. 눈시울이 아리다.

“에고, 별것을 다 보여주네. 지금은 감사하지요. 너무나 감사해요. 예전 처음 들어올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천국이랍니다. 시시때때로 식사 배달해주지요. 시간마다 하루 한 번식 약도 배달해 주지요. 어느 것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지요. 감사뿐입니다”

그녀의 입에는 감사가 달려있었다. 감사에 성공한 사람의 모습이다. 방금 전에 만났던 할머니는 감사에 실패한 모습이다. 감사와 불평 언어의 차이는 작은 듯이 여겨진다. 하지만 결과의 차이는 무척이나 크다.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차이가 크다. 천국과 지옥의 거리만큼의 차이랄까? 그래서일까 불평과 원망의 사람은 늘 불행하다. 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의 인생은 행복하다. 필자는 감히 말씀드린다. 어떤 말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불행한 삶이되기도 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렇듯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가정마다 전해져 내려온다. 소록도 사람들은 할 말이 수없이 많다. 그래서 봉사자들은 이미 들은 얘기를 방문 때마다 꼭 같이 반복해 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해서 저들의 한이 풀어진다면 들어야 하는 것이 봉사자들의 몫인 것을 어찌하랴. 소록도엔 따뜻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오롯이 남아있다. 옹글종글 거기에도 사람 사는 따스함이 문틈을 비집고 묻어 나온다.

 

시(詩) 한 수를 소개하자. 따스함이 전해져 오는 용혜원 님의 시(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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