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1:5-2:4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기독교 신앙의 트레이드마크중의 하나가 기쁨입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환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여호와로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문제는 기쁨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내 생각과 다를 때가 너무 많고 내 기대와 다르게 일하실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많고 감람나무에 소출도 많고 논밭에 먹을 것이 많고 우리의 양과 외양간의 소가 많게 인도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매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텐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논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의 양과 외양간에 소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도 성경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수용하고 그것이 옳으며 선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기뻐할 수 있을까요? 하박국서는 그 답을 믿음으로 제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막연한 기대와 소망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입니까?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의 악한 현실을 놓고 하나님 왜 그리하십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해 1:5-11절을 통해 답을 주시는데 나는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것도 아니고 너의 기도를 외면하지도 않으며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하고 있으며 일하고 계신다고 하면서 그 증거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기가찹니다. 그래서 하나님, 그것이 무슨 응답입니까? 하고 첫 번째 보다 더 대들면서 따져 묻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12절), 공의로우신 하나님(13절), 자기백성의 주권자이신 언약의 하나님(14절)이 악한 갈대아 사람을 들어서 유다를 심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이신 유다를 바다의 어족처럼 버리는 것이고 주권자 없는 곤충 같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유다의 언약의 하나님이고 유다의 주권자 하나님이 맞으십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라고 따져 묻는 것이 1:12-2: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2:1절을 보면 이런 선지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얼마나 분노하고 화가 났는지 첫 번째 항의에서는 그래도 입술로 항의하고 대들었지만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나서는 눈과 귀를 열고 눈과 귀까지 동원해서 거세게 항의합니다. “내가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파수하는 곳, 성루는 모두 바라보는 곳입니다. 선지자는 거기 서서 바라보고 보리라고 합니다. 무엇을 보겠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실 것인지 한번 지켜보겠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이 아니신 데도 정말 그렇게 하실 것인지 똑똑히 보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렇게 대들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때가 있습니다. 오래 동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하나님과 씨름해오면서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이 왔는데 너무 내 생각과 다르게 오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병이 낫기를 위해 기도해왔는데 병이 더 중해지고 형편이 좀 더 나아지는 것을 위해 기도해왔는데 더 나빠지는 현실을 경험할 때 그런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던가요? 그런 때도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던가요? 하박국처럼 대들고 따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응답이 수용이 안 되어서 터질 듯한 가슴으로 항변하면서 하나님,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 어찌하여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정말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라고 멍든 마음을 쏟아내면서 눈과 귀를 다 열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하는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하박국을 다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선지자가 되어가지고 그게 뭐냐?” 그렇게 야단치지 않고 하박국의 불평과 항의와 대듦을 다 받아주십니다. 그러면서 주시는 두 번째 답변이 바로 하박국서의 핵심인 2:3-4절입니다. 정한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이 잠시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지만 바벨론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때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 때에 속히 묵시가 이루어지고 반드시 이루어지니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 동안에 악인들이 더 성행하고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살아도 의인인 너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기다림입니다.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고 막연한 기다림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모습과 내용이 나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가장 선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의인입니다.

특별히 저는 오늘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저 같은 기성세대가 살아왔던 시대보다 더 엄혹합니다. 세상은 더 악해지고 교활해지고 있어서 여러분이 원하는 길이 여러분 앞에 펼쳐지지 않는 현실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꿈, 여러분의 기대와 갈망이 이루어지지 않고 외면되는 순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그 모든 순간을 하나님이 다스리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나의 기대와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 오늘이 나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는 시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인내하고 기다리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어찌 청년들만 그러하겠습니까?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고난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 기간이 길게 느껴지고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번 여름이 얼마나 무덥고 뜨겁습니까?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덥습니다. 그러나 이 견디기 힘든 한여름의 뜨거움과 무더위가 곡식을 익게 합니다. 때론 견디기 힘든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땅속의 온갖 병균을 죽이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처럼 지금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이어도, 지금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이 내가 납득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내용이어도, 지금 하나님의 응답이 내 생각과 다르고 내 기대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이 가장 옳고 가장 선하고 내게 가장 복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면 자포자기하고 성질대로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데 이 믿음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죠.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2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며 다스리며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테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을 판에 그려서 주시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판에 새겨서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크고 분명하게 주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악인이 성행하는 것을 봅니다. 더군다나 이런 현실은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 더 놀라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붙들지 않으면 절대로 그런 현실에서 믿음으로 살수 없습니다. 현실을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으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성질이 나고 분노가 치밉니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는 지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아서 모든 것이 절망적이라고 느껴지는 분이 여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판에 새겨서 주신 말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는 분명한 말씀 앞으로 달려가서 그 말씀을 듣고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 중에도 조금씩 믿음이 생기고 기도할 마음이 생깁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금방 환경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악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보다 더 지혜롭고 더 선하고 더 거룩하고 더 의롭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리고 그런 오늘을 견딜힘이 생깁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답입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믿음이 없으면 이 답답한 현실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환경을 믿지 마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낙심이 밀려오고 화가 나고 주저앉고 싶을 때 가만히 있지 마십시오. 그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역사를 보십시오. 건물도 사라지고 교회도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졌지만 의인들이 살았던 믿음의 흔적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들이 붙들었던 말씀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로 승리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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