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18)-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요즘의 뉴스와 이야기는 온통 먹거리의 문제들로 사회가 골머리를 썩고 있다. 살충제 계란 파동에, 살충제 닭 사건에, 네덜란드로부터 불어 닥친 소시지 파동 등 온 나라가 시끄럽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성 생리대 유해 파동과 북핵과 미사일에 대한 걱정까지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민들의 생활이 빨리 안정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 걱정이다.

사실 이런 때에는 따뜻한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 가족끼리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말이다. 모든 것을 예민하게 반응하면 나눌 것이 없다. 따뜻한 마음, 온화한 마음, 감사한 마음을 소유해야 사회가 푸근해진다. 그래야 감사에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할 일도 없다. 어쩌면 이런 난국, 난제에 복잡한 일들이 심리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생산적 사고’를 하게 하는 요인도 된다. 난제가 반면교사로서 우리들을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기도하고 두드리며 가게 하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문재인정부의 무한 북한사랑이 고갈되어가는 형국이다. 대북 인도 지원물량 800만 달러어치는 예정대로 진행할 모양이지만, 군사안보지형에서는 연일 불편한 심기가 보인다. 새 정부 들어 북한은 6번의 미사일 책동과 1번의 핵실험 등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연일 협박을 일삼고 있다. 미사일을 쏘아 바다로 떨어지도록 하는 형국이지만 그것은 방향만 바꾸면 언제든지 우리의 심장을 향해 날아올 수 있다. 더욱이 저들의 행위는 미국령, 본토 어디든 미사일을 쏠 수 있다는 신호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의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다. 실질적인 대책은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북한 주민들은 사랑해야 할 존재이지만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의 정권은 불량하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나라와 세계인의 고민이다.

감사운동은 사람을 신뢰하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운동임을 밝힌다. 이른바 한국어의 영문 발음의 첫 자를 따서 3S운동이라고 말한다. 이미 수 십 년 전부터 항간에서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3S(speed, sports, sex)로 풀었다. 이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외형만으로 평가한 단견이다. 그것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속도에 열광한다. 스포츠에도 열광한다. 섹스산업은 폭발하고 있다. 스피드의 편리성도, 스포츠의 대리만족도, 섹스의 쾌감도 인간의 내적인 영혼에까지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사운동은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을 살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따뜻한 운동이다.

 

어린 시절에 KYSoony 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줄곧 부반장(여학생 반장)을 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명석했고 활달했고 달리기를 잘했고 더구나 예쁘기까지 했다. 언제나 그녀는 여학생의 리더였다. 당시엔 말 붙이기도 어려운 고매한 친구였다.

세월은 모두를 낡게 만들어버린다. 그녀는 젊은 시절, 사랑에 빠져 20대 초 결혼하고 남매를 두었는데 그만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십 년이 흘렀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50대 중반,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77회 생신 모임을 가질 때였다. 실은 그 모임도 YSoony의 작품이다.

50대 중반에 만난 YSoony는 여전히 예뻤다. 다만 고생한 모습이 역력하여 마른 모습이었고 주름이 좀 깊어 보일 뿐이었다. 몇 번의 만남 가운데 조금씩 그녀에 대해 살아온 날의 사연을 들는 기회가 주어졌다. 기구하고 고단한 삶이었다. 20대 초에 버림받고, 어린 남매를 키우랴 살림 꾸려야지 그렇게 청춘은 날아갔다. 30대 중반, 이런저런 자영업을 해보지만 실패했다. 그리고는 돈 좀 벌어보겠다고 결심, 일본에 건너갔다. 한식당(韓食堂) 보조 일을 시작으로 주방장이 되기까지 20년간 고생~고생, 몸이 망가질 정도였다. 쓰지 않고 저축해 돈을 제법 모았다. 수천만 엔의 목돈을 믿는 언니의 소개로 중년의 사업가에게 빌려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만 사고로 죽어버렸다. 20년간 착실하게 모은 모든 재정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린 것이다. 망연자실, 허탈했다. 더 이상 일본에서 일할 수가 없어 한국에 돌아왔다.

초등학교 선생님 희수(喜壽) 연에서 만난 이후 그녀는 내가 목사라는 이유로 나를 따랐다. 믿음 생활을 권했더니 미용실 언니랑 가까운 교회에 나간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전화나 카톡으로 연락을 했고, 어렵다고 할 때마다 기도해주었다. 간혹 우리 집 감사 모임에도 다녀갔다. 신앙생활을 통해 그녀는 조금씩 회복되어갔다.

필자가 전화를 넣으면 교회생활의 기쁨을 재잘거리며 어린아이 모양 떠들어댔다. 남동인더스파크역 앞 어느 작은 커피숍에서였던가 자녀 이야기를 물었더니 아들은 직장인으로, 딸은 카레이싱모델로 잘 컸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심히 아파하는 게 보인다. 곪아 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찾아와 고향땅 오빠의 집에 내려가 잠시 기거하였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좋은 오빠고 올케언니라 해도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그녀를 곱게 보아줄 리 없다. 농사일로 바쁜 시골 살림에 갑자기 군 손님이 되어 버린 그녀였다. 어느 날 YSoony는 내게 전화를 했다.

“임 목사님아! 내가 힘들어~.”

“왜 그러냐?” 했더니 그간의 사정들을 줄줄이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고향에 내려와 있는데 불면증에 시달리고 우울증으로 자꾸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러면 안된다. 죽고 싶은 마음만은 이겨내야 한다. 그래, 요즘엔 어떻게 소일하니?”

“... 엉?” “갱변에 나가 공중화장실 청소하고는 면사무소에서 일당 받고 있어~. 조금이라도 벌어야잖아” “넘, 힘들어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불면증에 시달려서... 약을 먹다가 끊었는데~” “요즘엔 자꾸 자살하고픈 유혹에 시달려~”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면서 기도해주었지만, 그녀는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틀 후에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바닷가 갯바위에 가지런히 신발과 핸드폰을 놓은 채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YSoony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전화상으로 기도해준 이후, YSoony를 살려야 한다고, YSoony가 이러다간 자살할지 모른다고, 수없이 뇌이고 수없이 혼잣말로 기도했지만, 자동차 몰고 한 번도 찾아가지 못한 게 후회된다. 전화만으로는 안 되고, 고향에 내려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이야기까지 들어주었어야 하는 건데..., 곁에 사람이 없어서 그녀는 외로운 길을 떠났다. 위로해주고 공감하고 동행해주고 이해해주는 이 없어, 그녀는 거친 파도에 몸을 실었다. 일주일 후 인천공항 인근 바닷가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사람 인(人)이란 한자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이는 둘이 서로 기대어 선 모양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의미를 가르쳐 준다. 서로 돕고 협력하고 의지하고 지혜를 모아 살아가야 할 존재란 의미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거나, 쓰러져 있거나, 그것도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일어설 의지마저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노력, 수고, 재정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지의 젊고 패기 넘치는 한 젊은 기자가 어느 핸가 인도의 성녀 테레사 수녀를 찾았다. 자기의 젊은 시각으로 보건대, 실용주의적인 사고에 물들어있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테레사 수녀의 사역은 너무나 허무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테레사의 품에서 인도인들은 수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치료하고 돌보아 간혹 제 발로 걸어 나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녀의 기관에 들어온 사람 대부분은 연명치료만 하다가는 이내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수녀님, 여기에 들어가는 재정은 낭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이 많은 재정을 젊고 유능한 수재들에게 투자하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생산해 낼 텐데요.”

“...................?”  “젊은 기자양반!” 조용조용한 테레사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났다.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편하게 죽을 권리도 없다는 건가요?”

“한평생, 한 번도 편안하게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인데..., 죽을 때마저도..., 이들은 행복하게 나의 품에서 죽을 권리마저 없다는 말인가요?”

“.........................” 이 젊은 미국인 기자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주변에는 옆에서 살짝 거들어주면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널려있다. 살짝 격려하면 바벨을 들어 올리고, 공감해 주면 살아날 사람들이 많다. 한 번 더 시도하자고 칭찬하면 결국엔 목표를 이룬다. 성공과 실패의 거리는 멀지 않다. 성서적으로 볼 때 거룩함과 죄악(타락)의 길도 멀지 않다. 매우 가깝다. 우리들에겐 실력 있는 선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선한 선생님, 마음 따뜻한 공감의 선생님, 참으로 사람을 사랑해주는 좋은 선생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실력 있는 선생님만을 찾는 실용주의적 사고와 물량주의적 견지에서는 좋은 선생님의 의미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참 인격자 선생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가, 감사운동은 격려하는 것이다. 감사운동은 동행하는 것이다. 감사운동은 박수를 쳐주는 것이다. 감사운동은 칭찬해주는 것이다. 감사운동은 같이 아파해주고, 아픈 사람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감사운동은 지켜보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격려하는 사람이 있을 때 좌절하는 순간에도 일어서게 된다. 누군가 나와 동행할 사람이 있을 때 무서움은 사라지고 담대해진다. 누군가 내게 손뼉 쳐 주는 사람이 있을 때 힘든 순간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누군가 늘 곁에서 지켜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외롭지 않다.

YSoony의 카톡을 나는 아직 지을 수가 없다. 전화번호는 지웠으되 살아생전 그녀의 카톡은 지울 수가 없다.

“친구 목사님아~, 난 너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 한없이 좋다.”

Soony야, 그냥 이름을 부르렴, 괜찮다.”

“아니야, 친구 목사님아, 이렇게 부르는 게 편해”

“언제든, 시간에 관계없이 전화하렴, 카톡도 괜찮고”

“그래 알았어, 잘 자, 늦었다.”

그리고 그녀의 카톡은 멈추어버렸다. 지켜주지 못한 속죄하는 마음, 그녀의 말처럼 한없이 좋은 친구가 아닌 내가 여기 서 있다. 허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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