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모리 가조, 이원재 역, 새물결플러스, 2017.

본서의 저자인 기타모리 가조(1916-1998)는 루터교계 일본인 신학자이다. 서구신학자들에게만 익숙한 우리에게는 다소 생경할지 모르나 정작 서구신학자들 사이에서 저자는 동양권 최초로 세계적인 개신교 신학자의 반열에 오른 신학자로 인정받는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아픔의 시대'였던 20세기 중반, 저자가 들고 나온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은 서구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며 시대의 눈물을 닦으려는 시도 아래 등장한다.

저자는 루터교 전통에 속한 신학자답게 '십자가 신학'과 '숨겨진 하나님', '율법과 복음의 대조' 등 다분히 루터적인 개념들을 사용하면서도 이를 신학적-문화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신학적으로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중점을 두었다면 저자는 '하나님의 아픔'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신학을 관통해나갔고, 문화적으로는 서구적인 루터의 신학을 '일본적' 관점에서 계승발전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복음의 마음(혼네, 속마음)은 '하나님의 아픔'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아픔이야말로 복음의 정수요, 본질이라는 말이다. 그는 예레미야 31:20에서 이를 발견하였다. 아픔의 하나님은 자신의 아픔을 통해 인간의 아픔을 해결하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픔은 인간을 치유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아픔에 기초한 사랑이다. 이는 '오직 고통당하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말한 디트리히 본회퍼(이 역시도 루터교 신학자이다.)의 명제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인간의 아픔'이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여기서 하나님 안의 대립이 일어나는데, 죄인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과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진노의 대상을 감싸안고 사랑하는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과 긴장,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과 진노의 대립이 낳는 '제3의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아픔'이며 저자가 주장하는 복음의 본질이다.

저자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도매급으로 처리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한다. 저자가 첫번째로 비판하는 대상은 칼 바르트이다. 저자가 보기에 바르트는 인간과 하나님의 질적 다름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과 대립하는 배타적인 하나님 상을 만들었다. 이런 하나님은 인간을 품을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할만한 것만 사랑하는 율법적 하나님, 자신의 아픔을 통해 인간을 감싸안을 수 없는 하나님이다.

두번째 비판대상은 알브레히트 리츨, 아돌프 폰 하르낙 등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의 부성애에 기초한 직접적인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아픔을 겪는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인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도를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 때 그럴 수 없다고 완강히 저항한 베드로의 사탄적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셸링, 쇼토쿠 태자(불교), 헤겔 등을 비판하며 '엄밀한' 철학적 개념으로 복음을 제단하는 것은 도리어 복음의 엄밀성을 해치는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진정한 복음의 엄밀성은 세련된 철학적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혼네'를 가장 잘 표현하는 '아픔'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개념'으로부터 나온다. 이 촌스러움을 부끄러워하는 신학은 스스로 '영광의 신학'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상기한 신학자들(혹은 철학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아픔'을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도, 단순히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감싸 안아 변화시키는 것(마치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이 그러한 것처럼)이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의 중요한 임무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아픔의 이유가 되는 '죄'는 '진실한 죄'이다. 이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도 '진실한 진노'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 안에 숨겨져 있고 용서는 정죄 안에 숨겨져 있다. 즉, 루터에게 진노는 사랑과 내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외적인 수단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자칫 하나님의 진노가 가현설적 가짜 진노로 전락할 것을 우려한다. 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단지 감상적인 연민이나 사랑이 아니라 '진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이라는 내적 갈등과 대립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할 뿐더러 복음의 '혼네'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진노를 통해 표현되는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진노'와 대립하며 아픔을 겪는 사랑이며, 그 아픔을 통해 진노마저 이기는 '진실한 사랑'이다. 사랑은 아픔을 통과할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 한결같은 사랑이 될 수 있다. 저자는 모든 가현설적 요소들을 경계하면서 자신의 아픔의 신학이야말로 루터가 설명하고자 했던 숨겨진 하나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루터를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이어서 저자는 그리스적 사유에 기반한 고전적 삼위일체의 '본질'(ousia, substantia) 개념을 비판하며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로서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신조의 '본질' 개념은 '본질을 잃어버린 본질'이며, 그 자체로 '영광의 신학'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고대 신조에는 아들을 ' 낳으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존재하나,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그 행위에 있어 아픔을 겪으시는 하나님)이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이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아버지'라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관계적 아픔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픔의 결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픔을 매개로 하는 '아픔의 유비'가 발생한다. 자신의 아픔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아픔을 섬길 윤리적 근거를 만난다.

하나님의 아픔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상징화하여 증거한다는 것이요, 현실 속에서 이웃의 아픔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재하는 행위'로서의 아픔으로, 하나님의 아픔을 본받아 하나님과 단절된 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감싸 안고 그 아픔을 짊어짐으로써 단절을 회복시키는 행위이다. 자연스럽게 교회는 현실 속에서 이웃의 아픔을 짊어짐으로써 공동체의 아픔으로 하나님의 아픔을 증언하는 자들의 모임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의 아픔, 혹은 교회의 아픔이 그 자체로 어떤 생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아픔은 하나님의 진노의 현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픔은 그 죄의 결과를 십자가의 아픔으로 해결하는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을 통해서야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픔의 칭의'요, 우리 '아픔의 성화'이다. 이처럼 '아픔의 유비'는 우리의 죄와 불순종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며, 선하게 하고(칭의)로 순종하게 하는(성화) '구원론적인' 의미를 가짐으로써 '창조론적' 설명에 머무는 아퀴나스의 '존재의 유비'를 극복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받은 아픔을 통해 하나님과 세상의 단절을 다시 잇는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봉사한다. 하지만 우리의 윤리적 섬김은 숙명적으로 실패한다. 우리의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와 진노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막강한 죄의 영향력은 우리를 끊임없는 긴장과 모순 속으로 몰고간다. 즉 우리의 섬김은 언제나 미완결적이며 개방성을 갖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긴장과 모순, 미완의 개방성이야말로 끊임없이 반복하여 하나님의 아픔으로 돌아가야하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진리를 확증한다.

지금까지 저자의 신학적 논지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세 가지 질서'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랑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아픔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이다. 첫번째 질서는 사랑할만한 자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즉, '율법적인' 사랑의 질서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랑을 부정했고 이 사랑에서 탈락했다. 이에 따라 인간은 진노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두번째 질서에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아픔을 통해 자신의 직접적인 사랑을 부정한 인간의 불순종을 부정한다. 이로써 등장하는 세번째 질서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절대긍정'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한결 같은 사랑, 아픔을 기초로한 '복음적' 사랑이다.

인간이 비록 첫번째 사랑은 부정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그 부정을 부정한 세번째 사랑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간을 감싸 안는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인간은 감격하며 순종하는 인간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불순종과 아픔에 대한 '하나님의 아픔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루터교 신학자인 홀스트 푈만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희생(아픔)당했기 때문에 승리자'인 것이다.

저자의 신학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그의 독특한 복음사 이해에 있다. 그는 '복음의 민족성(?)'을 강조하며, 특히 서민들의 희극문학(비극)에 나타나는 민족정서 안에서 복음이 보존되고 유지 및 발전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복음은 그리스-로마적 정신으로부터 종교개혁시기의 게르만적 정신을 거쳐 '아픔의 시대'인 양차대전 이후, '아픔의 공간'인 일본에 이르러 비로소 그 충분한 이해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비극 문학 속에 등장하는 '쓰라림' 개념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인 '하나님의 아픔'과 가장 잘 호응한다는 그의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쓰라림'은 서구의 비극에 등장하는 괴로움이나 슬픔과는 다르게 타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를 괴롭히거나 죽음에 내모는데서 드러난다. 십자가와 호응하는 '아픔의 유비'가 일본의 문학에서 발견된다. 저자는 하나님의 아픔이 일본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현실이 되지 못했을 것이며, 일본의 마음에 의해서야말로 하나님의 아픔이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주장하며 신학의 중심을 서구에서 동양으로 옮기고자 한다.

종말에 있어 저자는 '복음이 전 세계에 철저해지는 것'이 종말의 징조라고 말한다. 이 복음의 철저함은 '세계의 아픔의 철저함'에 따른 '하나님의 아픔의 철저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픔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아픔에 기초한 사랑이며 우리의 아픔을 완전히 해결하는 아픔이기 때문에 오직 그 아픔만이 우리를 최종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 여기서도 '오직 은총'이라는 개신교주의의 진리가 재천명된다.

하나님의 아픔의 현실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종말은 이미 도래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하나님의 아픔은 아직 미완결과 개방의 상태로 남아있다. 이러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극심한 긴장 속에서도 종말은 좌절되지 않고,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희망의 대상'이 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위르겐 몰트만이 떠오르게 되는데, 몰트만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그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 희망의 근거였다면, 저자에게는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감싸안을 것이라는 믿음'이 희망적인 종말의 근거가 된다. <여운송 전도사는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 신학대학원 휴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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