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본절 앞절인 16절에서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교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이 강건케 되기를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즉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함으로 크리스천이 됩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셔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처음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있는 사람 속에 예수께서 거주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처럼 예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임재하시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실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마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기본이 되는 곳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의지가 형성되는 곳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시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시며, 우리의 삶의 최우선에 계셔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합니다.

(1) 믿음이 없는자(Natural)=불법을 행하는 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여기에서 "육에 속한 사람" 즉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라는 말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 즉 본질상 진노의 자녀, 즉 원죄를 갖고 태어난 자연인(natural, sensual)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성경에서는 행함이 없는 것을 믿음이 없다고 규정합니다(약 1:16). 그런데 행함이 있어도 믿음이 없는 자들이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 권능을 행할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한 습관적인 종교생활을 했을 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지 못한 자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특징은 "주여, 주여"를 큰 소리로 잘 외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입에서는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라며 그들의 입에는 "주"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주의 이름으로 교회와 교계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인일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름만 명목상의 주의 일일 뿐이지, 자신의 명예와 이익과 체면 유지의 방편일 뿐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2) 육신에 속한 자(Carnal Christian)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사도바울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육신에 속한 자"는 고린도전서 2:14에서 말하는 "육에 속한 사람"과 다른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육신에 속한 자"는 "사르키코스(σαρκικός)"라는 말로 이 말은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좇아가는(fleshly, carnal) 것을 뜻하는 말로서 거듭나긴 했으나 아직까지 걸음마도 못하고 젖만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즉 영적 저능아를 말합니다. 몸은 성인인데, 하는 행동은 한 두살먹은 어린아이의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비유를 통해서 그들이 아직 영적인 것을 감당치 못하는 믿음을 가진 것을 설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참을 줄 모르고 젖을 달라고 보챕니다. 젖을 줄 때까지, 즉 자신의 배가 채워질 때까지 웁니다. 영적인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육신의 것을 채워달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믿음을 가진 자는 아직까지 육신에 속한 자로서 육적인 것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자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항상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의 불신앙적인 육에 속한 생활태도와 마음자세로 인해 예수께서 그의 안에 거하시거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온전히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굳건한 믿음이 있는 자(Spiritual Christian)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고전 3:1)

"신령한 자" 즉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는 영적인(spiritual) 사람을 말합니다. 즉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된 "안디옥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에 거하시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의 어떠한 의로운 행위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

우리가 믿음을 갖고 믿음대로 살아야하는 이유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 6-9).

또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라고 말합니다.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의 복을 받은 복의 통로로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무엇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말씀을 듣지도 않으면서 믿음이 생길 것은 기대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있는 자는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말씀을 들으려고 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를 씁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 있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평소에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지를 보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에 대한 믿음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는지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세상 가요를 열심히 듣고 있다면, 그의 믿음은 가수라는 우상과 세상을 향한 믿음입니다. 만약 그가 운동경기에 열중해 있다면, 그의 믿음은 운동의 신을 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헬레니즘과 기독교는 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오늘날도 헬레니즘의 영향 즉 인본주의의 영향은 인간의 육체를 중요시하여 육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헬레니즘은 인간의 몸을 숭상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우상화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운동으로 단련된 몸과 그 몸으로 하는 올림픽입니다. 

올림픽이 무엇입니까? 공개적으로 그리이스신을 숭배하는 의식입니다. 올림픽 개막식이나 폐막식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계에서는 나라의 경제가 좋아지기 위해 올림픽이 개최되도록 기도하며 우상숭배의 죄로 나라를 오염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1988년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독교가 부흥했으나, 서울 한복판에서 전국적으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결과 한국의 기독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경제는 발전했지만, 교회는 종교다원주의 등에 물들며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국에서 그리이스의 우상들을 섬기는 일을 하자는 말입니다. 인간의 몸을 우상화하며 아름답게 만들고 열심히 몸을 개발하여 "미"를 추구하는 것이 헬레니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에게 열심히 운동을 하여 상을 받으라는 말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라고 한 것은 당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 상황을 언급한 것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리의 얼굴과 몸을 성형하며 세상적인 기준으로 아름답고 멋있게 만들어 '얼짱', '몸짱' 하면서 6-PACK을 만들고 근육질로 만드는 풍토는 바로 이 헬레니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물론 비만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아름다운 얼굴과 몸에 대한 우상에 빠져서 세상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믿음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모두들 자기 얼굴과 몸을 만드느라 비싼 화장품과 옷에 정신을 빼앗기고 해야할 일은 못해도 운동하러 가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코뼈가 무너져 내리고 성형중독에 걸리고 지방을 빼다가 죽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크리스천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헬레니즘의 영향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에 주목하도록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경기를 보았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이면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들은 모이면 성경을 묵상하며 친교를 가졌습니다. 성경 어디에 사람들을 향해 열광하며 사람들을 칭송하게 하도록 허락한 장면이 있습니까?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도 "이세상은 4S(screen, sex, sports, shopping) 때문에 망한다"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2002년에 주일 예배시간과 같은 시간에 월드컵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교회들이 어떤 일을 벌였습니까? 교회에 교인들이 안 나올까봐 월드컵 경기를 먼저 본 뒤에 예배를 드리겠다며, 예배당 스크린에 월드컵 경기를 띄워서 보게 했습니다. 그것도 "붉은 악마"라는 셔츠를 입고 응원하는 것을 예배당 안에서 버젓이 틀어놓았습니다. 예배시간에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월드컵이라는 우상과 "붉은 마귀"를 경배한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예배를 드린다?

이것이 교회입니까? 이것이 믿음이 있는 교회가 해야할 일입니까? 아닙니다. 이러한 교회들이 바로 바울이 책망한 고린도교회의 모습입니다. 거듭났다고 하면서 아직도 육체의 일을 좇아가는, 아직까지 젖병을 물고있는 성인의 우스꽝스러운 영적 저능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것을 세상사람들이 조소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믿음이 없이 몸뚱이만 커진 교회들을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에 열중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성경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과 큰 교회가 무엇을 할지라도 그것이 잘못되었으면, 따라가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출 23:2).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매우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도둑질하러 양의 무리에 들어와서 조금이라도 틈만 보이면 우리의 삶을 노략하여 주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적그리스도와 이단이 많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고 주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서있는 삯군이나 목사 안수를 받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교회와 주의 종들을 무너뜨리는 기독교 언론들 즉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양의 탈을 쓴 늑대들로 인해 수많은 주님의 양들이 먹히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문제는 "설마, 목사가 거짓말을 하겠어?", "명예훼손으로 고발 당할텐데, 설마 거짓말을 기사로 쓰겠어?"라고 너무나 어린아이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간과하며 그냥 지나가다가는 어느날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목사들 중에도 믿음이 없거나 믿음과 상관이 없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없고 육적인 삶에 대한 목마름이 더 크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라지와 이리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않거나 새로나온 사람에 대한 호칭이 마땅치 않다고 "성도님"이라고 부르는 웃지못할 일들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몸을 너무나 아낀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피곤해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조금만 이익이 없어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조금만 욕을 먹어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어나서 하나님과 독대를 한 뒤에 하루종일 예수님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병도 고쳐주시고, 말씀도 가르쳐주시며 상담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일(십자가 지기 전, 사도를 세우기 전)을 앞두고는 밤을 새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슨 특별한 운동을 하셨다는 말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운동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비록 몸은 연약하고 아플지라도 하나님의 사역을 충분히 실행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운동을 하여 몸을 단련했을지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몸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데에만 사용합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엉뚱한 데에 발산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 중에는 자신의 건강을 자신이 돌봐야 한다며 운동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 나아가 육체미와 운동 실력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정작 해야할 기도와 말씀 묵상 즉 믿음의 훈련은 별로 하지않고 운동만 한다면, 그리고 정작 돌봐야할 주님의 양떼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몸만 돌보고 있다면, 이런 자들은 아직까지 육신에 속한 자들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보다 그리고 주님께서 양육하라고 부탁하신 주님의 양떼보다 자신의 육신에 더욱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행위가 동반됩니다.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 나 자신의 행위의 열매(아가페 사랑)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 깊이 묵상해보면서,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를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믿음(πίστις)과 충성은 같은 단어로 쓰였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있다면, 정말로 성령의 열매인 충성(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면, 한줌의 먼지로 사라질 몸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까지 세상적으로 나의 어떠한 것을 자랑하고 싶다면 그리고 자랑하고 있다면, 그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정말로 건강한 크리스천이라면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고 싶고 주님의 말씀만 전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며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인간이 생각하는 신뢰나 확신같은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양떼들이 성령의 열매이며 성령의 은사인 믿음을 갖고 주님의 임재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기를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인간의 확신과 신뢰가 아닌 성령의 은사인 믿음의 선물을 받았고,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믿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행위로 믿음을 얻으려고도 하지 말고, 믿음이 없는 이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행위를 강조해서도 안됩니다. 오직 기도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처럼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은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만 즉 기도로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오늘 나의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너무나 저 자신과 교회가 잘못가고 있는 것을 깨우쳐주심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지금껏 세상의 풍조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그저 나라가 잘 되면 좋은 줄로만 알았고, 건강하기만 하면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제가 확신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아닌 성령의 은사인 믿음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잘못된 믿음을 깨우쳐 주시고, 바른 믿음 생활을 하도록 매순간 저와 동행하여 주옵소서.

제가 젖먹이 신앙을 갖고 있었다면, 어서 제가 제대로 장성한 신앙인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지 말게 하시고,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제가 믿음이 없어서 주께서 제 안에 거하시지 못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왜 저에게 임재하지 않으시는지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을 주 앞에 고백합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고 믿음이 없어서 그랬사오니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사오니, 주여 저에게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주옵소서. 저에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을 주옵소서. 그래서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직 그리스도만 붙잡고,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담대히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이 저를 보며 조소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느끼기를 원합니다. 안디옥교회가 그랬듯이,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에게 흔들림없는 굳건한 믿음을 주시고 오직 주님만 찬송하며 주님의 말씀만 사모하며 주님께 영광돌리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성령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하심 속에서 주님만을 높여드리기를 원하오니 저의 찬양을 받아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