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요즘 주말 저녁이 되면 우리 집의 두 여인은 응답하라 1994본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저도 덩달아 같이 그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재미있더군요, 보다가 기억에 남은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드라마 중간에 나오는 텔레비전 뉴스였습니다. 국어 문법 파괴에 관한 짧은 보도였는데 내용인즉 당시 유행하던 컴퓨터 채팅에서 빨리 쓸 수 있고 간단하게 쓸 수 있는 표현들을 사용하다 보니 정상적인 국어의 말과 글의 형식들이 파괴되는 현상을 걱정하는 그런 뉴스였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은 아예 휴대폰 문자나 스마트폰 카톡이 대화의 수단으로 자리 잡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컴퓨터 채팅보다 더 글과 말이 압축되어야 하고 줄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국어의 문법과 형식은 더 많이 파괴되고 은어와 축약어 말줄임표, 이모티콘, 세미콜론이 난무합니다. 조금 지나면 아예 그렇게 줄여진 말들이 새로운 국어로 자리 잡아야 할지도 모를 형편입니다.

재미있게 사용하면 되지 뭘 그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게 그리 간단하게만 볼 문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문법을 제대로 모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고력 자체가 약화되고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기억 구조는 이미지는 금방 흘려보내고, 언어적 스토리를 저장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카톡의 문자는 언어로 된 스토리보다 이미티콘이나 축약어가 주된 문자입니다.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콜라스 카가 자신이 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나는 이전의 뇌를 잃어버렸다”며 인터넷이 사람들의 사고를 얕고 가볍게 만든다고 지적했다면 스마트폰은 더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문법은 글을 쓸 때 그 사회가 약속한 하나의 글쓰기 형식입니다. 그 형식이 너무 쉽게 파괴된다는 것은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에베소서 서론부터 발견되는 교훈입니다. 바울 당시 사람들이 주고받는 서신에는 그 사회가 약속한 하나의 일정한 형식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내는 자가 받는 자에게 자기를 소개하고 그리고 인사를 하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도 어김없이 이런 형식과 격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공중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도  땅의 격식과 형식들을 파괴하거나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도 불신자들과 똑같이 회사에 출근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사업을 합니다. 인사할 때 인사하고 먹을 때 먹고 잘 때 잡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의 일상과 우리의 일상이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격식과 형식에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격식과 형식이 갑자기 고상해진다거나 유별스러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형식과 격식에 담겨 있는 내용은 너무나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자고 입고 사업하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는 모든 내용에 자신의 욕심과 세상적 야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그 모든 형식과 격식 속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내용으로 담겨 있습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이 세상의 일상의 격식과 형식을 무시하지 않고 그 격식과 형식에 새로운 내용인 그리스도를 채워서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의 서론인 인사에서 불신자들이 편지를 쓸 때와 똑같은 편지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밝히고 소개할 때도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바울이라고 밝히고 편지를 받는 에베소교회와 성도들을 부를 때도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설명함으로 그 내용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채워놓고 있습니다. 신실한 자들이란 믿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어디에서 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한 자들이 성도라는 뜻입니다. 그는 교회와 성도를 이해할 때 대형교회 성도, 작은 교회 성도라는 식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목사가 설교하는 교회의 성도, 그 자리 좋은 곳에 있는 교회의 성도,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의 성도 이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똑같은 형식의 자기소개와 교회소개이지만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채워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건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의 형식과 격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일상과 모든 삶의 격식 속에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과 그리스도라는 내용으로 채워서 표현해내는 참된 영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의 인사인 은혜와 평강입니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으시는 분이라면 금방 이 인사가 바울의 서신서 마다 반복되는 전형적인 인사말인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 인사는 바울의 트레이드 마크야! 그냥 별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인사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인사에는 그 사람의 소원과 시대의 경향이 녹아 있기 때문에 인사를 보면 그 사람과 그 시대의 흐름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인사가 무엇입니까? 부자되세요, 대박나세요, 성공하세요, 예뻐지세요. 건강하세요입니다. 부와 성공, 미와 장수가 사람들의 관심과 시대의 관심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중국 연변의 남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인사가 유행했답니다. “아직도 그 여자와 사오?”

그런 의미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바울의 인사는 절대로 습관적이거나, 의미 없는 인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마다 다른 인사가 아니라 오직 이 인사만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인사입니다. 그럼 왜 바울에게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가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출발도 은혜이고 과정도 은혜이고 결론도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호의와 사랑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희생시키시고 아무 대가 없이 베풀어주는 용서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죄인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인생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죄와 허물로 죽어있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고 각자 자기의 욕심을 향해 질주하면서 삽니다. 그 결과 요1:10-11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었는데도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심지어 자기 백성들마저 자기 땅에 오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전부 주님의 필요성도 모르고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주를 믿게 되었고 알게 되었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신부가 되었고 그의 몸인 교회가 되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에베소라는 거대한 세속의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울의 헌신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복음의 통로로 사용하셨지만 정작 그렇게 쓰임 받은 바울 자신은 언제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자신의 헌신과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수고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을 말입니다. 바울이 교회들에게 인사할 때 마다 꼭 은혜와 평강이라는 내용으로 인사하는 것은 그들의 그들 됨과 그들이 소유하거나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들이 만들거나 그들이 조건이 되어서 결과 된 것은 하나도 없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된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 인사가 이렇게 중요합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사는 곳입니다. 모두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욕망의 경쟁을 펼치고 승리한자들은 웃고 진 사람들은 웁니다. 그러나 이 경쟁에는 이긴 자나 진 자나 평화가 없습니다. 이겨도 불안하고 지면 억울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이 늘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자기에 근거해서 세워져 있고 흔들리는 세상 속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기 인생을 흔들리는 세상과 자기 자신 위에 세우지 않습니다. 반석 되시는 하나님위에 세우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세웁니다. 성도의 삶의 원천은 자신의 힘과 보이는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기서부터 참된 평안이 허락됩니다. 참된 평안은 사우나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 침대나 맛있는 고급 음식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평화가 힘에서 온다고 믿습니다. ‘팍스 로마나’이고 ‘팍스 아메리카나’입니다. 그러나 참된 평안은 은혜에서 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제자들은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모여서 문을 걸어잠그고 두려움과 불안함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면서 평안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평안을 구하지도 않았고 찾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평안도 은혜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두려운 현실이 있고 불안한 내일이 있어도 주님이 함께 있으면 그 은혜로 평안이 허락됩니다.

말씀을 맺을까요?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사단은 늘 죄의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우리의 삶과 교회 가운데 평안을 깨트리고 영적침체를 유도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로부터 오는 은혜가 필요치 않는 때가 있는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죄로부터 스크린 해주고 새로운 마음을 날마다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관영한 죄악 속에서 거룩하게 살 수가 있으며 평안하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폭풍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고 그 평안을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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