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성경의 다리를 믿음으로 연결하는 것이 영적 세계를 열어가는 지름길이다.

현대인들은 상식에 준하는 언어를 좋아한다. 어떤 논리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합리성, 과학성, 이성, 경험, 지식, 등 상식의 범주 안에서 논리를 전개할 때 타당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신앙의 세계는 항상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 높은 순종을 요구할 때가 많다. 상식과 이성과 경험의 세계와 믿음과 이상과 초월성의 세계 사이에는 쉬우면서도 참으로 건너기 어려운 난관이 존재한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박사, 본헤럴드신문 발행인, 등저서: 주기도문연구, 충성된일꾼되어가기 등

▣하나님의 주문: 벗은 발과 벗은 몸으로 다녀라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상식을 벗어난 주문을 한다. “벗은 발과 벗은 몸”(사20:2)으로 다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완전히 포기할 것을 주문했다. 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라고 했는가?

당시 신흥 강대국 앗수르가 블레셋의 5대 성읍중 하나인 ‘아스돗’을 점령하였다. 애굽은 근처에 위치해 있는 아스돗이 앗수르에 의해서 점령당하는 것을 보고 큰 두려움에 떨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유다는 구스와 애굽을 의지하며 자랑했다.

이런 위기와 두려움과 불안속에 있던 국제 정세속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특별한 예언을 주문하셨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상식을 벗어난 주문을 하신 것이다. 유다가 의지하고 자랑하며 믿었던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의해서 포로가 되어 벗은 발과 벗은 몸으로 잡혀간다는 예언이다.

이렇게 상식을 벗어난 주문뒤에는 하나님의 뜻이 항상 있다.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요구 뒤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것을 묻고 따라가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며, 이것이 성경의 세계를 열어가는 열쇠이다. 왜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까? 현실과 하나님 말씀인 성경 사이에 긴 인내의 줄다리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순례의 여정이 신앙의 길이다.

 

▣아브라함: 열방을 섬길 제사장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시고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했다. 2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주시지 않았다. 모든 인간적인 희망이 사라진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반듯이 네게 아들을 줄것이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물학적으로 아기를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본인들 스스로 자신의 몸 상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하나님께 말씀하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겠습니까’. 여호와께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라고 되물으셨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노부부는 생물학적인 기준을 뛰어넘어 아기를 낳는 기적을 맛보았다. 아브라함 나이 100세에 아들을 주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을 때가 75세이다. 75세에 비전을 받았다. 사명을 받았다. 자녀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그런데 25년 후에 아이를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주문을 하신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요구를 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번제로 드려라’ 하나님의 요구가 이해가 안되지만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그 순간,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위대한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창22:17-1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상식을 벗어난 믿음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외하는지를 알고 싶어서이다.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복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믿음의 조상을 삼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다. 열방의 아비를 삼기 위해서 특별히 부르신 사람이다. 모든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첫 시발점을 아브라함으로 선택하셨다. 열방의 제사장으로서 선택되었기에 더 수준 높은 생명을 드리는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장로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삼 일에 살아 날것을 예언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는 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도 드릴 각오로 말했다. 그런데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반응은 아주 상식을 벗어나는 말씀을 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수제자 베드로를 보고 사탄이라고 하셨다. 네가 나를 넘어지게하는 자라고 아주 실랄하게 비판을 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고 비판했다.

주님의 비판에 제자들과 우리들은 멍 때릴 수밖에 없다. 도대체 주님이 왜 상식에 벗어난 말씀을 하셨을까? 오히려 베드로를 향해서 칭찬을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이성있는 사람들의 행동인 것이다.

이 사건 후에 주님은 제자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도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무슨 연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주님의 말씀에는 뜻이 있다.

제자는 서열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제자는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남을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다. 제자는 주님의 거룩한 삶을 좇아가는 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자신에게 닥칠 고난을 말한 것이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베드로의 생각을 바뀌어주셨다. 제자의 사명이 무엇인지,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제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가르치셨다. 그 결과 베드로는 주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길을 말없이 순종하며 걷게 되었다. 베드로는 생명을 받쳐 헌신하다가 마지막 거꾸로 십자가가에 매달린 채 순교했다.

하나님의 사건 뒤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삶이 복이 있는 인생이다.

▣삼년 동안 순종한 이사야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상식에 벗어나 행동을 요구하였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요구앞에서 이해가 안되지만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사20:3) 되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해되지 않지만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요 ‘성도의 생활’이다. 순종이란 무엇인가? 순종은 듣는 것이다. 듣는 것이 순종의 출발이다. 또한 순종은 지키는 것이다. 순종에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 순종은 따르는 것이다. 순종의 더 높은 차원은 따르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설교를 들었지만, 주님의 본질적인 사역을 위해서 따르는 사람은 적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결과는 아름답다

위대한 계명과 위대한 명령에 대한 위대한 순종과 온전한 헌신은 위대한 교회와 교인을 만든다. 이것은 기독교의 명제이다. 순종과 헌신없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산 꼭대기에서 100년동안 방주를 지었다. 사람들이 조롱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걸어갔다. 자그마치 100년이다.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이런 우직함을 우리들은 오늘날 보고 싶어한다. 남에게서 그것을 요구하지 말고 자신이 우직한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보기로 결단하면 어떻겠는가?

순종을 통해서 노아의 가족은 몰살당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가치는 방탕과 타락과 색욕의 세상 질서에서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켰다는 것이 더 소중한 가치이다. 이것이 순종의 아름다움이다.

 

▣록펠러의 기적

석유왕 존 록펠러가 마음에 담았던 말씀이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 영혼을 지키거니와 그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잠19:6). 록펠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받았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 가지 면에서 기적을 일으켰다.

첫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게 된 것이고, 두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주었던 사람이고, 세 번째 기적은 장수였다.

그는 98세까지 살았는데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고 깨끗하고 건강하게 살다가 소천했다. 록펠러가 이런 3가지 기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주일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으며, 성경을 매일같이 읽었고,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말씀을 날마다 대면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늘 말했다고 한다. 록펠러를 평가할 때 부정적인 판단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위대한 신앙의 유산은 우리가 다시 되새겨볼 여지가 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자신의 전부를 드렸다. 믿음의 길에서 헌신과 순종이란 단어를 빼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종교인이란 껍질만 남게 된다. 열매는 없고 형식만 무성한 매 마른 가지처럼 불쌍하게 외롭게 된다.

신앙의 정의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것이다. 신앙이란 세상의 밧줄을 놓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행동: 징조와 예표

이사야의 행동은 당시 구스와 애굽 백성들에게 예표로 보여준 것이다. 앗수르에 포로가 되어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끌려간다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표와 기적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는가? 나의 모습은 어떻게 비취어지고 있는가?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담배, 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회사에서 분위기와 고객과의 거래를 위해서 담배와 술을 함께 나눌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 마음이 편한가? 또한 비그리스도인이 나의 주초문제를 보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까? 한국의 문화에서 쉽게 좋은 행동이라고 동의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우리 문화에 스며있는 역사적 전통이며 관습이다.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 유다 경고

이사야의 행동에 대한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다를 위한 경고였다.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사20:5,6).

이 말씀에서 자랑했고, 믿었고, 달려갔다는 표현이 중요하다. 이 경고를 통해서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유다는 구스와 애굽을 자랑했다. 유다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스와 애굽을 믿었다.문제앞에 어려움앞에 항상 애굽을 그리워하고 자랑하였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게 달려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유다가 믿고 의지하고 자랑했던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벌거벗은 채로 잡혀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의지할 때 의지하는 것을 거두어 가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우리의 의지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자리는 오직 하나님이다. 우리는 다양한 문제 앞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믿음의 가치가 달라진다. 한순간에 평생을 지켜왔던 믿음을 사단에게 던져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한순간에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여 하나님께 칭찬받고 승리하는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라.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믿는 모습을 가정에서 보여주어라. 문제 앞에서 갈등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의 모습으로 성숙하라. 고난이 닥치면 고난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 말씀을 펴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혜를 간구하라. 이것이 우리가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의 후손들에게 보여줄 영적인 능력이며 힘이다.

우리 한국은 외교적 위기에 있다. 중국, 미국, 일본을 의지하다보면 언젠가는 배신당하는 것이 국제관계이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 주님의 지혜로 국제 외교의 디딤돌을 놓아야 한다.

때로는 주님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요구에는 항상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믿음의 지혜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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