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목사, 뉴욕 퀸즈제일교회 담임, KAPC 뉴욕동노회장, 총신대 및 합신대학원 졸업

부모는 자녀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는 것처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형제가 여럿이면 화목하게 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결혼을 하면 형제간에 화목하기가 더욱 쉽지 않아집니다. 가끔 여러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그보다 더 큰 보람과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형제끼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이 가장 좋은 효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인 그리스도인들 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을 빌어, 인간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말 행복해 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성경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로 인하여 이만큼 기뻐하시고 흡족해 하시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흡족해 하시는 모습을 다윗은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고 묘사하였습니다. 헐몬산은 팔레스타인 북쪽에 있는 산입니다. 그 산 정상에는 언제나 눈이 쌓여 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눈이 녹아 수증기가 증발하여 올라갔다가 흘몬산 남쪽 아래 들판에 이슬이 되어 내린다고 합니다. 헐몬산 아래 초목들과 농작물들은 그 이슬로 인하여 건강하게 자랍니다. 이슬은 소낙비와 달라서 연한 새싹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이슬을 먹고 건강하게 자라는 초목들과 곡식들, 그리고 그것들의 혜택을 입고 사는 동물들과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의 시적 탁월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을 인하여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흡족해 하시며 영광 받으시는 상태 가운데 모든 인생의 궁극적 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 교회들 중에 화목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경쟁하고 시기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찢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싸우고 원수 맺는 경우도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하실 교회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과 은혜 받기를 그렇게 목말라 하면서 정작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최고의 복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복의 진수이지만 그것이 곧 인류의 로망이기도 합니다. 정상적 인간이라면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연합과 화목입니다. 심지어 전쟁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연합과 화목을 지향합니다.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문화 등 그 무엇이라도 인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연합과 화목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흡족해 하시는 연합과 화목보다 나은 가치와 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어떤 형태로건 궁극적으로는 연합과 화목을 추구하지만 불행하게도 연합과 화목을 이루고 누리지 못합니다. 20 세기 초 폴란드 문화인류학자 말리노우스키(B. Malinowski)는 모든 사회의 축제에는 표방하는 기능과 숨겨진 기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칸 인디언 중에 호피 인디언족(Hopi Indians)이 있는데, 이들은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기우제를 영어로는 rain dance라고 합니다. 비 오기를 비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기우제는 비 오기를 기원하는 일종의 종교적 제사지만, 부족의 단합을 강화하는 숨겨진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인디언은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누가 물어보니까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는 것도 일종의 재난입니다.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재난이 닥치면 인심이 사나워 집니다. 그러니까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도 부족의 화합을 위해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인디언들에게 기우제는 그 부족 사회의 선 순환을 위한 사회적 기능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민속종교와 샤머니즘에서도 공동체의 연합과 화목을 도모하는데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연합과 화목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연합과 화목은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인간은 지키고 누리면 되는 것을 그마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지와 어리석음과 불신 때문입니다. 연합과 화목의 기능을 하는 사회와 집단을 콩트와 스펜스는 하나의 생물체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이론을 구조기능주의((structural functionalism))라고 합니다. 콩트와 스펜스의 이해 기초가 형성된 이 이론은 그 후 뒤르켐, 빠레토, 말리노우스키 등을 통하여 다양하게 발전하였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인 파슨즈에 이르러 극히 포괄적인 사회학 이론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이 이론은 사회의 본질을 상호(相互) 의존적인 관계(關係) 혹 부분의 집합으로 구성된 체제(system)로 봅니다. 이렇게 보는 자들을 기능론 자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사회를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하여 상호(相互) 의존적인 여러 기관이나 부분이 전체의 생존과 존립에 공헌하고 있는 관계로 보았습니다. 때문에 한 사회를 구조와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며 그 지속과 번영을 위하여 질서, 균형, 안정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의 합의와 통합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드러난 기능은 그 집단의 물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고 드러나지 않는 기능은 그 집단의 보다 더 중요한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사회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소속감이 그 공동체를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민족 명절이나 종교적 축제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화합과 정체성의 고취를 위해 나름의 유익한 기능을 합니다. 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 그 사회에서 합의된 정체성이나 가치관이나 소속감이 불분명하면 반사회적이라고 하여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만약 사회 구성원 다수가 그렇게 되면 마치 면역력이 떨어져 허약하게 되는 몸처럼 가치 질서가 혼란하여 그 사회는 머지않아 심각한 정치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지금의 의식 있는 사람들 중에는 대한민국이 그런 경우가 아닌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민족 명절인 추석이 다가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추석이 큰 명절입니다. 사람들은 추석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그 불편한 교통 혼란과 어려움을 감수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추석이나 설 명절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이는 표면적 이유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가족 간의 화합입니다. 개별 가정에서도 부모님 생신이나 기타 잔치에 가족이 함께 모이지만 부모님 생신이나 기타 잔치에도 제대로 모이지 못하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어느 가정이나 예외 없이 함께 모여 화목을 도모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주어집니다. 흩어져 살던 가족이 함께 모여 화목을 도모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도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건강하면 사회도 건강하게 됩니다. 연합과 화목은 개인보다는 공동체와 타인의 이익을 먼저 도모하는 것인데, 이는 결국 개인이 행복하게 되는 길입니다. 현대 정신과 가치는 이 원리에 역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연합과 화목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현대는 지나칠 정도로 개인주의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올림픽이나 국제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속내야 어떻든 표면적으로는 국위 선양을 일차 목적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자기실현을 국위 선양보다 자연스럽게 앞세웁니다. 이런 현상을 좋게 보아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선수들이 전보다는 개인적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국가나 가족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시대정신입니다. 이런 개인주의적인 시대정신은 실존주의와 상대주의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런 사상과 가치관이 나름 좋은 면도 없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 가치관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 개인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은 홀로가 아닌 함께 하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상호 의존하고 협력하는 것이 본래의 존재 양식입니다. 그 본능을 거스르면 어떤 존재도 결코 건강한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생명체뿐 아니라 인위적인 집단도 그 정체성에는 반듯이 소속감이 강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의 모든 단체와 집단은 그 구성원들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을 요구합니다. 정체성과 소속감이 전제되고야 그 집단의 기능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생명체와 사회에게 주어진 창조 질서이기 때문에 교회나 하나님 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의 드러난 기능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전도하고 가르치는 것이고 드러나지 않은 기능은 연합입니다. 드러난 기능은 드러나지 않는 기능을 지향합니다. 이를테면 교인들이나 불신자들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긍정적 대 사회적 기능이지만 연합과 일치는 대 사회적 기능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합니다. 진정한 연합과 일치는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이고 목표입니다.

왜 모든 부모는 자녀들이 다른 무엇보다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할까요? 부모는 배워서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본능적 질서이기 때문에 연합과 화목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자녀들이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을 기뻐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진정한 연합을 기뻐하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연합의 복을 누릴 뿐 아니라 사회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라도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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