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우리는 참된 위대함에 대해 어떠한 정의를 내립니까? 누가 위대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을 위대하며 큰 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위대하다 하셨습니까?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을 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를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평가하셨습니다.

[9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례 요한은)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9-11).

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도 주 하나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세례 요한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와서 세례 요한에 관하여 말합니다.

[13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눅 1:13-16).

즉,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 요한이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세례 요한을 보며 분명히 발견하는 것은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돈을 쌓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한 벌 옷과 하루 먹을 석청만 있던 가난한 자였습니다.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지위를 지니고 또한 정치적인 권력을 지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권력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할 만큼 아무런 힘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주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세례 요한을 귀하게 여겼지만 그 외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세상의 찌꺼기 같이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가브리엘 천사 및 주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큰 자라 하였습니까? 그 근본적인 요인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자세히 나옵니다(참, 요 1:19-23)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내려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네가 누구냐”고 물을 때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나는 아니라.”
“네가 그 선지자냐”
“나는 아니라”
“그러면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대답하라. 너는 네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 하느냐”
이때 세례 요한이 분명하게 답변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주께서 그리스도로 오시는 길을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살던 서기 1세기 때에는 유대 땅 대부분의 길이 곧지 않았습니다. 큰 행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어느 동네에 방문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이 미리 앞서 가서 왕의 마차가 지나갈 길을 넓히며 곧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은 이 땅에 오실 왕의 길을 온전히 닦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세례 요한은 위대한 자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고,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그 길을 미리 닦는 심부름꾼이요 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 선지자’나 또는 ‘그 말씀’이 아니라 ‘그 선지자’의 ‘그 말씀’을 전하는 ‘소리’일 뿐임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교만하여지거나 거만해져서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기억하는 가운데 주께서 정하신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나는 소리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소리이다.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한 소리일 뿐이다.”

그는 이러한 의식을 늘 지니고 자기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점에서 주 앞에서 위대한 자라는 칭찬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 앞에서 받은 소명은 무엇입니까? 아직 주의 소명이 없다면 방향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소명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없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먹고 사는 경쟁에 치여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처럼 복음의 소명을 받고 나아가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과 함께 하십니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며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어느 곳에서든 주께서 부르신 소명을 위하여 일하고 있으면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주의 소명을 잃고 자신의 명예와 세력과 영광과 배를 위한다면 그는 본능으로 사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성장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품고 그 소명을 위해 달릴 때 급속하게 성장합니다. 소명이 있으면 영혼이 소성하게 되고 소명을 잃으면 그 삶은 목적을 잃고 방황합니다. 주님이 주신 소명, 곧 사명을 받아 사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야망인지 소명인지 스스로 질문해 보기 바랍니다. 야망은 내 개인을 위하여 공동체를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야망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악착같이 자기만 살려고 합니다. 야망의 사람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자신의 힘과 영역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끝없는 경쟁 심리와 질투가 그들의 마음과 삶을 다스립니다. 그러다가 언제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됩니다. 이는 야망의 사람은 어느새 지극히 교만한 자리에 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선을 넘는 순간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야망을 지닌 자들은 교만과 함께 패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소명을 가진 자는 자신이 죽고 남을 살립니다. 언제나 양보가 있고 덕이 있습니다. 가족 및 교회공동체를 살리며 마을을 살리고 민족과 나라를 살립니다.

야망의 사람과 소명의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은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아무런 열매가 없든지 또는 남을 찌르는 가시 열매를 맺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족 및 교회 공동체를 살리며 유익을 주는지 아니면 공동체를 부수며 파괴하는지를 점검하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에 가장 큰 유익은 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주의 복음을 순수하게 지켜내는 일, 그래서 바른 복음으로 구원 받는 자가 많아지는 것과, 나아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아 자라나는 것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로부터 소명을 받은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는 받은 소명과 사명을 위해 어떠한 역경과 장애가 와도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쓰러지지 않고 인내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평가에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주님께 의탁하고 자신의 할 일을 밀고 나갑니다. 그 이유는 그가 받은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소명을 받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알기 때문에 상황이 어떠하든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소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야망은 그 사람이 죽을 때 함께 사라짐으로 헛되지만, 주님이 주신 소명으로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이 죽어도 그가 남긴 열매는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 삶이 주님이 주신 비전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확인하기 바랍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소명이 확인된다면 여러분들은 말할 수 없는 하늘의 평강과 기쁨과 감사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야망으로 인한 질투와 이기심 가운데 늘 불평 불만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특이한 훈련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수 천년 동안 주의 백성들이 기다려 왔던 메시아를 맞이하게 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마침내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시켜야 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훈련은 세상에 물들지 않는 훈련이고, 또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훈련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주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삶은 세상을 본받지 않았으며, 이를 위해 강인한 의지와 분별력을 갖기 위한 특별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훈련은 광야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오랫동안 홀로 지내며 그의 사역을 준비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깊은 광야에서 주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을 내려놓고 겸손을 배웠으며, 세상의 명예와 영광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겸손의 비밀은 광야에서 주님과 오랫동안 깊게 교제하는 훈련을 쌓은 데 있었습니다. 이러한 훈련을 받고 통과한 점에서 세례 요한은 주 앞에서 위대한 자로 인정 받은 것입니다.

광야 기간의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 훈련을 제대로 통과한 후 지금은 주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그 광야 훈련을 받고 있습니까? 철저하게 훈련을 받기 바랍니다. 그 훈련은 세상에 물들지 않는 거룩의 훈련이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충성의 훈련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오늘 본문에서 그가 왜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 3:27-30).

어떤 위대한 왕자가 이미 정혼한 신부를 맞이하여 결혼식을 하려고 하는데 어리석은 신하 하나가 스스로 자기를 높여 신부의 마음을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온갖 노력을 한다면 그러한 신하는 왕 앞에서 어떤 신하입니까? 반역자이며 사악한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정신 나간 어리석은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은 후, 사람들의 관심을 주님으로부터 빼앗아 죄 많고 교만한 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다면 이 얼마나 패역하고 악한 종입니까?

그러나 요한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27절입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고백은 내가 받은 은사, 위치, 사명, 존재 등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오직 그것들을 그분의 뜻에 따라서만 사용하겠다는 마음 자세를 나타낸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그 당시 헤롯 왕의 아성을 견줄 만큼 대단한 인기와 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그는 그리스도로 여겨질 만큼 엄청난 신임과 지지를 받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결코 잊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 영적인 은사 때문에 교만하여진 고린도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교만의 도가 지나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즉,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대적하며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지혜를 자랑하며 “누가 더 높으냐”를 따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왕 노릇을 하며 교만하여졌고, 사도의 가르침과 다스림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사실 바울에게 권위를 주신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지혜와 또한 여러 영적인 은사를 붙들고 스스로 대단히 여기며 교만하게 행세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참 종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자, 바울이 외칩니다.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전 4:6-7)

그러면서 이러한 바울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말합니다.

[4: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4: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고전 4:8-13)

사랑하는 여러분!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어떤 신자는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자기 영광을 구하고 바울과 같은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인내하고 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신자들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입니까?

세례 요한은 후자였습니다. 즉, 신랑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들러리는 자기 역할만 하고 숨는 것입니다. 이에 그는 자기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질적인 정신 자세를 고백합니다. 그 정신은 “주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는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결코 주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빼앗지 않겠다는 정신입니다!

바로 이 정신이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 자세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의 신분이 어떠하든, 여러분이 광야에 있든 궁궐에 있든, 나이가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 진심으로 주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산다면 여러분은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영광을 얻지 않고 오직 주께만 영광을 돌리겠다는 자세를 지니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요약하면, 세례 요한의 근본 정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그 위치에 있으며 이는 오직 주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삶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한 동기를 가지고 산다면 그가 바로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드러나지 말고 그분이 드러나야 하리라.”
“그분이 받을 영광을 내가 가로채지 말고 오직 그분만이 영광을 받게 하리라.”

이에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언제나 그의 손가락을 들어 그리스도만을 가리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참된 종이 누구입니까? 설교가 마친 후에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종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가짜 종입니까? 이단 교주들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로부터 빼앗아 훔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주의 참된 신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분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순수한 동기로 내 삶과 모든 것을 다 드리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작은 자들은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자기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하며 자기 세력을 쌓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새 주의 영광을 가리고 흉측한 질투와 미움과 다툼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주 앞에서 그들의 열매는 수치와 패망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권력과 돈과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으로 교회에서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자신의 세력 확장과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거짓 종이거나 거짓 신자이며, 혹시 주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기저귀나 찬 갓난 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오직 주께만 영광 돌리려 한다면 그가 바로 참 종이요, 참된 신자이며 세례 요한처럼 성숙하고 위대한 주의 자녀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외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 3:11).

세례 요한은 자신에 대해 인식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며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 당시 노예들은 주인을 섬겼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시키는 것이면 뭐든지 다 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스승이 말하는 것이면 절대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관습에 의하면 노예라도, 제자라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신발 끈을 묶어주고 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 일은 짐승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러한 천박한 일마저도 감당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는 주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낮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을 향할까 두려워하면서 철저하게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였습니다. 그는 오직 그분을 지시하며 그분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크고 위대한 자라는 칭찬을 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정신은 다름 아닌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남을 섬기는 겸손한 자가 하늘에서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또한 겸손한 자의 삶의 특징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마 18:5).

왜 어린 아이 같이 연약한 자까지 섬길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높이기 위함이요, 그분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족한 종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 드립니다. 겸손을 훈련 받기 바랍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그분만을 의지하는 훈련을 받기 바랍니다. 특히 성령을 매일 순간마다 구하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본성상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무관심하고 그러할 능력도 없지만 성령이 충만하면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역시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여러분들이 광야의 세례 요한처럼 하늘의 온전한 영적인 훈련을 받아 온전히 주 예수님과 복음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주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는 보이지 않는 수고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교회는 오직 세례 요한처럼 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하여야 한다는 정신을 지닌 자들에 의해 든든히 서 가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손가락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할 일도 단 한가지입니다. 주의 양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가 행하는 모든 예배와 교제와 교육과 선행과 발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 얻는 복음을 알려주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믿음의 분량까지 자라날 수 있도록 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교회 내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처럼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감출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주께서 그들을 높이시니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인들은 주 앞에 위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끝까지 겸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늘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그 인생 가운데 자랑하며 증언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봉사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수고가 되기 바랍니다. 내 텃세, 내 영광, 내 영향력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한다면 그것은 정치이지, 세례 요한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간교한 계산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데로 그대로 거두도록 하실 것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7-9).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은사나 재능보다 그들이 그 은사와 재능으로 누구를 높이는지를 보십니다. 즉, 동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한 동기라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자이니 주 앞에서 작은 자입니다. 그러나 주를 높이기 위한 동기라면 그의 은사가 작고 재능이 부족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없더라도 주 앞에서 큰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다 같이 외칩시다.
“나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내 자신은 낮아지겠다. 나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겠다. 나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내 인생을 주의 몸 된 교회의 희생 제물로 바치겠다.”

이러한 정신이 주 앞에서 위대하여지는 신앙 정신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마지막으로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주님을 위해 수고할 때 어려움이 찾아옵니까? 주께서 주신 사명을 받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외롭습니까? 인생이 광야입니까?

그렇다면 그 기간을 세례 요한처럼 준비 기간으로 삼기 바랍니다. 그러한 기간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주 앞에서 위대하게 만드시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에 철저하게 겸손을 배우고, 그래서 내 자신을 감추며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마음과 삶을 갖게 됨으로 인하여, 언제나 주의 몸 된 참 교회를 세우는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의 칭찬과 영광이 우리 머리 위에 머물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기 바랍니다.
‘주여, 그러합니다. 이 어려운 기간에 더욱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

오늘 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예배를 통해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여져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는 고백을 하기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과 믿음의 삶은 세례 요한처럼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예언처럼 영원토록 빛나는 위대한 별이 될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오늘 이 예배 이후로 이 귀한 정신을 철저하게 가지고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큰 자로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