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한국 평양대부흥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던 아주사 대학에서 열린 한인세계선교사대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나누던 중, 함께한 분들과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게된 곳이 바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였다.

건물 규모가 작다는 느낌과 전통적 장로교 예배모습에 큰 기대를 가질만한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교회설립역사가 무려 110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우리는 약 100여명 모이는 교회에서의 예배후 식사자리를 함께하신 12대 담임목사인 박일영목사가 이교회와 한인들의 역사에 대해 저녁예배후 기념관 관람과 함께 알려주시겠다는 말에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되어 교회마당의 바로 옆 건물이 과거 임시정부 역활을 하였던 기념관이며 이건물이 1938년 순수하게 한국인에 의해 지어진 것임을 설명하면서 역사적 배경을 알려주었다. 그때 드는 생각은 어떻게 대문조차 하나가 되어 있는 교회 옆에 이런 역사적 건물이 서 있을 수 있을까 정말 신기했다.

바목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당시 한인들의 이주에 대한 살아있는 역사를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우리는 놀라기도 했고 신기하기까지 하며 우리가 간과했던 역사에 대한 눈이 새롭게 열리는 듯 했다.

1903년 인천 제물포를 떠나 하와이로 이민을 온 1세대 한국인들이 사탕수수농장에서 10시간이상씩 험하고 격렬한 노동에 종처럼 부림을 당하던 이들이 당시 불안한 구한말 국내정세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 중 일부는 하와이에 그대로 남고 또 일부는 일할 곳을 찾아 미국본토로 들어와 당시 도시가 형성되고 있던 엘에이에 이주하여 정착한 첫번째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척박한 노동환경에 고생을 엄청나게 하면서도 그들은 교회를 짓고 또 나라의 풍전등화 같은 운명을 걱정하며 국민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신앙과함께 나라사랑운동을 벌였던 곳이 바로 이곳 이었다.

바로 이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는 한인들이 이주한 1913년에서  3년이 지난후 방화종전도사를 중심으로 미국사람으로 이들을 돕던 분들과 함께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LA에 있는 거의 대부분 한인들이 국민회 회원으로 등록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세금을 내듯 자금을 모으고, 교회를 통해 예배의 기도로 단합하고 명실공히 친교의 공동체를 만들어 한국인만의 독특한 민족공동체의 성격을 형성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펼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1938년 지어진 이 교회이며, 교회 옆에는 당시 국민회가 운영하던 회관과 신문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신문사에는 당시의 인쇄윤전기와 조판기가 아직도 광복운동 당시 대한의 심장을 달구던 모습그대로 당시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나라의 주권을 상실하게 되어 일제의 식민지와 다름없는 상황이 되자 한인들은 조직적으로 지역마다 저마다의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하와이에서는 하와이지방총회, 멕시코에는 1909년 4월 메리다 지방회 그리고 LA에는 1909년 2월 북미지방총회를 조직했고, 1911년8월에는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며 대한인국 중앙총회로 창립하여 이곳 엘에이에서 해외한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국민회의 지도자로는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서재필 등이었고, 공립협회가 바로 이 교회옆에 설립되어 과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비슷한 역할로서 당시 모든 한인들의 희노애락과 함께 미국에서의 굴직 굴직한 역사를 만들어갔고 대한의 독립과 광복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만주와 중국에서의 광복운동은 지정학적 영향력으로 공산주의적 사상과 폭력 투쟁적 경향의 임시정부 조직체가 형성되어 독립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활동이 극렬한 군사적 운동이었다면, LA를 비롯한 미국에서의 독립광복운동은 이와는 전혀 상반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LA에서의 한인광복 독립운동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교회중심, 예배중심의 성격으로 주로 교육적 방법과 외교적 방법을 모색하고 세계적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환기시키는 운동이었다. 당시 양대 산맥과 같은 사상적 두 갈래의 흐름 속에서 이곳에서의 활동은 외교적이며 교육적인 그리고 신앙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이 중심축을 이루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안중근 열사의 이토오히로부미의 저격에 도화선이 되었던 놀라운 사건이 바로 이곳에 있던 한인들을 통해 일어났다. 당시 친일파 미국인이었던 더럼 스티븐슨(워싱턴주재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대한제국외교고문)을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가 저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함으로써 미국과 국제사회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돌파구를 주는 방향적 전환을 이루기도 하였다.

한편 미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1941년 김용성 사령관과 잭셰리 교관 등에 의해 훗날 유한양행의 회장이 된 유일한 박사가 포함된 한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어 정식 육군군사훈련과 함께 특수 임무를 띤 요원들이 배출되어 직접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공군군사훈련을 받은 군사조직이 연합군의 한 일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증을 받았고, 1942년 일명 맹호군이라 불리는 한인 중심의 군사조직은 연합군의 냅코 프로젝트에 투입되기 직전까지 갔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생생한 광복운동의 진원지가 교회였고, 믿음과 신앙을 중심한 우리의 선조들이었음을 확인하는 놀라운 현장에 서 있었다.

이 선배들의 독립의지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역사의 현장 나성한인 연합장로교회의 마당 비록 지금은 퇴색되고 누구도 알아보거나 중요시 여기지도 않는 낡은 벽돌 한장한장들이 장엄한우리 역사를 품고 지금도 여러 젊은이들의 예배 공간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그 값진 마당에 서서 우리 선배들의 눈물과 애환과 독립정신의 기상을 생각해 보며 마음이 숙연해 짐을 느껴본다. 이들의 끓어 넘치던 십자가 사랑 나라사랑이 뜨거운 햇살이 된듯 맑고 푸르게 내려 쪼이는 교회마당이 한층 더 정겨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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