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20)-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제사를 드리고 난 후 동생을 들(野)로 유인하여 죽여 버린다. 아벨(히, ‘헤벨’-숨, 허무, 무상)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목자이며(창 4:2), 여호와께서 열납 하는 제사를 드린 인물이다(창 4:4). 아벨은 그 이름처럼 허무하게 가인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했다. 제사를 받지 않은 분(대상)은 분명코 하나님이시다. 가인은 하나님께는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만만한 동생만을 화풀이해 죽인 꼴이다.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왜 가인이 살인죄를 저질렀을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낳은 첫아들이 가인이다. 또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아벨이다. 아벨은 양치는 목자가 되었고, 가인은 농사꾼이 되었다(2절). 세월은 많이 흘렀다. 가인은 땅의 소산, 곡물(穀物)을 제물로 삼아 제사(祭祀) 드린다(3절). 아벨도 자기가 기르던 양의 첫 새끼를 잡아 제사드렸다(4절). 공교롭게도 동생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창 4:4,5). 여기에서 문제가 불거지고 만다.

보통 창세기 4장에서 3~5절을 주석해 나가는 학자들은 대개 제사 예물에 초점을 둔다. 가인의 ‘곡물은 합당치 않았다’는 식이다. 아벨이 드린 동물 제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이었다는 식이다. 제물은 죽어져 드려지는 법인데 가인의 것은 죽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물로만 본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소치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이나 문화적으로 땅의 소산인 곡물보다는 동물의 제사만을 받으시길 좋아했다면 이는 정당하지 않다. 당시 가인과 아벨이 살았던 문화, 환경적 배경에서는 그런 점을 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무튼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다’라는 표현뿐 어디에도 ‘첫 곡물’이라든지, ‘그해의 햇곡식’이라든지 식의 표현이 없다.

이는 분명 가인이 제사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음을 암시한다. 가령 누구와 다투었다든지, 마음속 자기와 다투었다는 상상이다. 마음속에 일던 당해 연도 최선의 곡물을 선정하는 데에, 그리고 양(量)의 문제를 고민하던 중 실패했다고 여겨진다. 가인에게 있어서 제사자의 정성도 필요했다. 가인에게 제사는 감사와 고마운 마음의 결실이어야 했다. 가인에게 ‘내가 하나님을 찾다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가’라는 긍정의 마음이 요구된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자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마음 상태(이는 어떤 문화를 막론하고 요구되는 것이다-靜(정), 平穩(평온), 平靜(평정), 感謝(감사), 肯定(긍정), 期待(기대))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가인에게 있어서 말이다.

Cain and Abel,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860

한발 더 들어가 보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4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5절)고 성경은 기록하였다. 이 문장을 묵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제물만을 원하신 게 아니다. 제물은 제사 양식, 제사 형식의 일부요 과정일 뿐이다. 사실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제사드리는 사람이다. 제사드리는 사람의 마음, 제사자의 현 상태가 제사드리기에 합당한가? 제사하는 사람의 문제이다. 아벨과 그의 제물은 준비된 상태였으므로 받으셨다. 하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준비돼 있지 않았으므로 그날은 거절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준비돼 있지만 사람은 언제나 시시때때로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는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답게 준비되었는가? 그것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고 본다. 마음이 정(靜) 한 상태인가? 마음에 평온(平穩)함이 있는가? 그 마음에 평정(平靜)을 찾았는가? 마음에 긍정(肯定)과 감사(感謝)가 있는가? 다음 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축복하신다는 기대(期待)를 갖고 있는가? 형식만 남은 제사(미사, 예배)는 무의미하다. 과정에 진정성이 있어야 하며 또한 집전하는 이는 물론 참여자의 태도와 마음 상태가 합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우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 화가 치밀었다. 늘 다스리지 못하던 화병이 도졌다. 헛간에 들어가 사냥도구와 동시에 흉기를 준비했다. 이웃마을에 살던 아벨의 집에 달려갔다. 동생을 꼬드겨서 들로 나가 때려죽일 생각이다. 흉기는 한편에 감추었다. 침착한 척 숨을 고른 채, 어젯밤의 길몽(吉夢)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좋은 먹잇감을 사냥할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들로 꼬여 내는 데 성공하였다.

“오늘은 일진이 좋아, 어젯밤에 큰 짐승을 잡는 꿈을 꾸었단 말이야!” 호기를 부리면서 가인은 아벨을 죽일 계획을 착착 진행해 나가고 있었다.

“저기 보인다. 늑대, 사막의 여우들이다.” “아벨, 너는 왼쪽 산모퉁이로 돌아서 짐승을 내리 몰아라. 난 여기 바위틈에 숨어 있다가 짐승이 내 앞을 달릴 때 화살을 당길 테니까, 응?”

가인은 작고 예리한 돌을 호주머니에 함께 담고 있었다. 아벨을 죽일 요량으로 말이다. 가인의 구상은 예상처럼 어렵지 않았다. 늘 형에게 순종적이던 아벨은 오늘도 형과 하나가 되어 늑대몰이에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늑대, 여우사냥은 일 년이면 한두 번씩 하던 형제들의 놀이였던 것이다.

아뿔싸 늑대몰이를 하느라 힘겹고 애쓰며 달리던 아벨. 숨어있는 큰 바위 앞쪽으로 늑대와 함께 달려 내려오는 아벨을 흡사 먹잇감이라도 되는 양, 가인은 동생을 때려눕히고 말았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8절)

Cain and Abel, Pilma il Giovane, 1576

왜 가인은 동생을 죽여야겠다는 극단의 생각까지 하였고, 끝내는 죽이고 말았을까?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았을 때 성경의 표현은 이렇다.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5절)고. 이때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신다. ‘네가 분해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6절). 한마디 더 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가인에게 있어서 제사와 관련하여 마음자세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책망하셨다.

‘분낸 사실, 안색이 변한 사실,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였다는 유추, 그래서 낯을 들지 못하는 사실’ 등 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관찰하시던 하나님이시다. 가인에게 있어서 제사에 실패한 뒤, 감사와 긍정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을 그릇은 없었다. 감사와 찬양을 해야 할 제사와 예배드리는 자의 태도에서 가인은 빗나가 있었다. 가인에게 제사자의 그 어떤 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11:4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가리켜 말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히브리서의 관점으로 본다면 확실히 아벨은 믿음의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이다. 반면 가인의 믿음에는 문제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믿음의 예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함을 성경은 말씀한다.

 

필자의 고향 영흥도(靈興島), 탑골 마을 한가운데는 널찍한 텃밭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큰 미루나무와 오동나무가 각각 한 개씩 그리고 감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바깥채와 안채, 한집 같은 모양에서 두 가정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딸만 있는 두 과부 권사님의 집이다. 한분은 건강하고 재주가 있어서 날품을 팔며 농사일을 해가며 살아가는 반면, 한 권사님은 몸이 약해 바람 불면 날려갈 듯한 약골 체형이니 품앗이는 생각도 못하고 수양딸을 들여서 구멍가게로 겨우 연명하셨다. 사는 모습은 각기 다르지만 인품과 신앙인격만큼은 누가 큰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옹골찼고 존경받는 분들이었다. 누구에게나 화를 내는 법이 없으며 늘 상냥하시고, 평생 새벽기도에 헌신하시고 주일성수를 지조로 사는 믿음의 가정이었다. 두 분은 입만 열면 감사가 넘쳤다.

‘감사하지, 그것도 감사한 일, 그만한 것이 다행 아닌가?’ 필자가 어린 시절, ‘도장 부스럼’(피부병)이 손목에 자주 생겨 긁고 다니면, ‘훈이야 목사님께 가봐라. 목사님은 좋은 약을 가지고 계셔’ 하면서 꼭 문제를 목사님과 함께 풀어가도록 말씀하시던 감사할머니들.

‘훈이는 뭘 좋아하더라? 심부름해주어서 고맙고 감사하지’ 필자의 어린 시절, 심부름 수고에 눈깔사탕을 주시는 날이면 꼭 그렇게 묻곤 하였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나무는 베어져 벌렁 드러난 터에 비닐하우스 몇 채뿐이지만 그 옆을 지날 때면 ‘두 분 감사권사님’ 얼굴이 한없이 보고 싶다.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The Gratitude Diaries)의 저자 제니스 캐플런은 말한다. 의사인 남편이 한 밤중에 응급실의 호출을 받고 집을 나갈 때마다 마음이 상했었다. 상담 선생님의 지도에 감사마인드를 가지고 묵상해나갔다. 한밤중에 남편이 나가서 환자를 돌보고, 환자가 회복을 하고 건강을 찾는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남편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환우들에겐 기쁨이겠구나. 남편에 대해 오해하던 마음을 고쳐먹기로 맘먹으니 남편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남편. 어느 날 새벽인가 갑작스러운 응급실 전화호출에 그는 아내가 깰세라 앉은뱅이 등을 켜고 옷을 입으며 비상출근을 준비한다. 캐플런은 그에게 살짝 다가가 키스를 해준다. 남편은 아내의 따뜻한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놀라워한다. 이렇게 감사는 감동이다. 감사는 남편을 감동시킨다. 삶에 역동을 일으킨다. 감사는 살맛이 나게 한다. 캐플런의 작은 변화가 남편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다. 그날 이후 이들 부부는 행복하기 그지없이 살아간다. 감사하면 달라지는 게 너무나 많다.

 

가인은 감사에 실패하였다. 제사에 한번 실패했다고 모두 실패한 것이 아니다. 한 번 실패했어도 다시 실패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한 번에 모두 성공하는 것은 많지 않다. 어린이가 걸음마를 완성하는데도 2천여 회의 넘어짐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서울대의 김난도 교수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역설했다(2012년, 오우아). 병원에 다녀도 한 번에 모두 병 낫는 게 아니다. 여러 번 치료해야 한다. 수술도 수백 번의 고뇌 끝에 정성을 들여야 낫는 이치와 같다.

가인은 한번 제사에 실패했다고 목숨을 걸었다. 모두 망친 것이라고. ‘아우의 것만 받으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감사하지 못한 가인은 끝내 아벨을 죽여 버리는 것으로 생을 토막 낸다. 감사하지 못한 결과는 아벨을 죽인 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자신의 인생도 미래도 끝없이 평탄치 않았다. 동생을 처참하게 살인한 자라는 딱지로 일평생 짓눌리는 생을 살아가야 했다.

 

다윗은 시편 50:23에서 매우 독특한 제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매우 특별하며, 없는 자에게, 가난하여 고통받는 자에게, 그리고 억압과 인권을 유린당하는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 사는 어떤 자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복음이요 희소식인데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가인에게 필요한 것은 양의 제사라든지 첫 새끼의 구별된 제사보다는 오히려 감사의 제사가 필요했다. 그가 만일 감사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면 그는 옳은 행위로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구원의 세계를 보았을 터였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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