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9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은혜 중에도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성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곳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사부터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했던 것 기억하시죠? 1:7절에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고, 2:5절에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린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며, 2:8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도 은혜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1:3-6절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지어져 가는 것이야 말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 중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저 주셨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냥 은혜라고 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이 우리가 지불한 대가나 수고한 노력이나 흘린 땀이 없이 그저 얻은 은혜라고 대수롭게 생각하거나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는 그저 받은 것이지만 너무 귀한 은혜이며 영광스러운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귀한 은혜를 왜 그저 주었을까요? 너무 고귀하고 너무 엄청난 희생이어서 도저히 값으로 계산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으로 따진다는 자체가 미련한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값비싼 은혜이고 영광스러운 은혜인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잘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특별히 은혜와 덧붙여서는 더욱 사용되지 않습니다. 큰 은혜, 귀한 은혜, 풍성한 은혜, 값진 은혜란 말은 쓰지만 은혜의 영광, 영광스러운 은혜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거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혀 생각지 않았던 호의를 받았을 때 이 귀한 은혜를 어떻게 갚지요 이런 표현은 쓰지만 이 영광스러운 은혜를 그렇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영광이란 말은 함부로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광이란 말을 쓸 때는 그것이 미치는 결과가 눈부실 정도로 엄청나거나 대단할 때, 그리고 그 결과가 실제 우리의 삶에 엄청난 혜택과 효력을 미칠 때 비로소 영광이란 말을 씁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의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저 주어졌지만 그 은혜가 우리에게 끼친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며 우리의 삶에 주는 혜택과 효력이 엄청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미친 놀라운 결과와 효력, 그리고 혜택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1.우리가 빠져 있었던 죄의 깊이가 얼마나 깊고 엄청난 것인가를 알아야 하고, 2.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런 우리를 건져 얼마나 높고 존귀한 자리로 올려놓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죄의 자리에 빠져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늘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늘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도 전부 가난하게 살고 그러면 너무 가난에 익숙해져서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언제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까? 진짜 부자를 만날 때입니다.

늘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언제 자신이 죄인이며 죄에 속한 삶이 참으로 비참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까? 의인을 만날 때입니다. 그 전에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잘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언제 충격을 받았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진짜 의인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거저 의인이란 기도를 많이 해서 등이 조금 굽고 금식을 많이 해서 얼굴이 상하고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의인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등이 굽은 것도 아니고 잘 잡수시는데도 그렇게 죄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혀 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더 이상 풍성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풍성한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만났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완벽한 의인 앞에서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인이 무엇인지,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야 비로소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망가졌으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으며, 철저하게 썩고 부패했는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내가 이 처럼 썩고 냄새나는 존재인 것을 모릅니다. 자기가 얼마나 교만하고 무례하고 완악하고 철저하게 망가진 사람인지 모릅니다. 모두가 자기는 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습니다. 이제는 거동도 못하시고 대 소변도 못 가리시고 음식을 거의 못 드셔서 병원에 모시게 되었는데 거기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보고 또 같이 계시는 어른들을 보면 전부 거동을 잘 못하십니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 고집이 있고 강단이 있으시더니 나이 드니까 인생이 저렇구나 싶어서 안타깝고 불쌍하고 측은했습니다. 건강하게 사는 사람과 비교하면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할 정도입니다.

나이든 어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아이들이 병들어 누워있는 것을 보면 인생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은 더합니다. 아프리카의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 뼈밖에 남지 않아 쾡 한 눈망울로 슬프게 허공을 쳐다보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죠. 소아병동에 입원해서 머리에 링거를 꽂은 체 말라있고, 기침하면서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아이들을 보면 병이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구나. 어서 빨리 병을 고쳐서 저 아이가 마음껏 뛰놀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가 다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노인들처럼, 소아병동에 입원해 있는 아이들처럼 하나님이 원래 주신 생명과 건강함가 부와 존귀와 영광을 다 잃어버리고 사람은 사람인데 이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이 안가는 그런 비참한 상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에 죄가 치료되기 전에는 아무리 건강하고 많이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비참함과 무의미한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지금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있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죄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아름답게 살수 없는 사람들이 인생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하나님이 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그런 인간이 죄 때문에 이렇게 형편없이 망가지고 파괴되어, 무지하고 무감각하고 뻔뻔스러워진 것을 보시고 우시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되었을까? 요양병원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환자들처럼 소아병동에 입원해있는 가련한 아이들처럼 왜 마음껏 살지 못하고 저렇게 되었을까? 저렇게 지음 받은 인간이 아닌데 죄가 인간을 저렇게 만들고 말았구나 하고 탄식하며 민망히 여기며 우셨습니다. 은혜가 있기 전 우리의 형편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썩어 냄새나는 비참한 우리를 살려내고 건져내었습니다. 그냥 살려낼 뿐 아니라 추성훈의 딸 사랑이처럼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십니다(1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은 자가 되게 하십니다(2:6).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저 주신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단순히 죄로 부터의 해방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하나님의 기업이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엄청난 지위와 자리로 우리를 옮겨 놓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해놓은 결과입니다. 응답하라 1994의 칠봉이, 나정이 쓰레기의 사랑을 보면서 느낀 게 그것입니다. 나정이의 마음에는 쓰레기 오빠 밖에 없습니다. 쓰레기의 마음을 받지 못하고 쓰레기를 보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이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그리스도 없이는 내 삶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으로 되는 그 자리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성실함과 책임으로 살아내는 고마움과 감사함이지 내가 마음을 다 바칠 대상은 아닌 것을 알아갑니다. 가장 비참하고 가장 쓸모없는 우리를 최고의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있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더럽고 추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저 주어졌다고 값싸게 취급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거저 받았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사람들이나 짐승들에게 지은 죄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나 짐승에게 지은 죄도 그냥 잘 지나가지 않는데 하물며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 지은 죄,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그분을 배반했고, 그분께 대항했고, 하나님께 반역하여 대적한 우리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죄입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넘어갈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고 차마 죄를 보지도 못하는 분이며, 회전하는 그림지도 없으신 너무 거룩하신 분, 그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미안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해결 될 수 없는 성격의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묻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너무 엄청나게 큰 죄이지만 그 죄를 훨씬 능가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그에게 짊어지우신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아직 아들답지 못하고 아직 신부답지 못하지만 여전히 사랑 안에서 그렇게 만들어져가고 있습니다.

지나온 2013년 한해도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한 해입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소원대로 된 것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이 큰 은혜로 그의 백성들을 붙드셔서 한 해 동안의 여러 가지 일과 사건과 어려움과 기쁨과 슬픔의 시간들을 통해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더 배우게 하시고 세상에 대한 헛된 욕망을 내려놓게 만드시고 하나님 없이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그런 인생으로 한 걸음 더 진전시켜 오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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