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2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가끔씩 사람이 만든 도시문명을 보면 도대체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었기에 타락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높은 빌딩을 만들고 첨단의 문명을 만들었을까? 하고 인간에 대한 놀라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보면 인공적인 도시와는 비교가 안 되는 장엄한 영광이 있고 하나님의 신성과 권능 앞에 놀라움 정도가 아니라 찬송이 나오게 되죠.

2007년도 중국에서 3개월의 안식년을 보낼 때 운남성의 원모라는 작은 농촌에 토림이라는 곳을 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외지고 작은 도시에 그토록 신비로운 절경이 있는지 발길이 닿는 곳곳, 눈길이 닿는 곳곳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저녁 무렵 석양에 비친 붉은 빛의 토림은 참으로 경이로운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에베소서를 대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쓴 사도바울은 독자들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세계의 놀라운 비경으로 안내하면서 자신의 찬송을 소개합니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든 도시와는 비교가 불가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권능이 깃들여있는 창조세계와도 비교가 안 되는 또 다른 차원의 놀라운 영적세계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이 놀라운 영적세계의 절경들이 곳곳에 들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맨 처음 사도가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끄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라는 구원의 세계입니다. 그것이 3-14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3개의 골짜기가 있는데 4-6절에는 성부의 골짜기가 있고 7-12절의 성자의 골짜기, 13-14절의 성령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성부의 골짜기에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선택의 풍경과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여 아들 삼으신 양자의 교리가 숨어 있습니다. 성자의 골짜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속하신 구속이라는 놀라운 영적세계가 들어있습니다. 성령의 골짜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믿음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영적비경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내용은 바로 7절-12절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7절을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위해 성자 예수님이 피를 흘려 그들의 죄를 속하시고 죄와 사망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불러 그의 아들, 그의 소유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 속량이라고 번역된 단어 ‘아폴뤼트로시스’라는 단어는 값을 치르고 사온다는 뜻입니다. 노예 상태의 종을 값을 주고 사와 해방시켜 자기의 소유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왔다는 말은 우리가 죄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죄의 종 된 자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죄의 값이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그 값을 우리에게 묻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치루어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아들, 소유 삼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서 하나님의 소유되게 했는가? 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 그것도 풍성한 은혜가 그렇게 했다고 하십니다(엡2:4, 2:7, 3:8). 이것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우리의 결단과 노력, 헌신, 봉사와 열심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거듭 확인해야 하지만 우리의 구속은 우리가 요청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허물과 죄로 죽어 사탄의 종이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이끌려 다니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살고 있었을 때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큰 사랑으로 베푸신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우리의 구속입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값없이 받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은혜를 그냥 은혜라 하지 않고 풍성한 은혜라고 합니다. 원문에는 이것이 조금 더 강조되어 있죠. 우리말 번역 8절 후반부에 있는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라는 구절은 원래 7절의 은혜의 풍성함을 관계하는 관계대명사절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우리에게 넘치게 주신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구속,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넘치고 풍성한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이 아니고는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기업과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 은혜의 흘러넘치는 용량이 아니고는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와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변하고 배반하고 하나님을 아프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상하게 합니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어 그의 아들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소유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마음을 두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또 다른 것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의 백성 삼아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이웃을 사랑하며 살도록 피조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로 살도록 율법을 주셨고 선지자와 왕과 제사장과 여러 제도를 통하여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고 가르치고 명령하고 호소했습니다. 율례와 절기와 제사제도와 안식년제도와 희년제도, 노래와 복과 저주를 통한 다양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짓밟은 배신의 역사와 패역과 행음의 역사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절하였고 자신들의 욕망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행악하였고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지체를 버렸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가지면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부어졌습니다. 

만세 전에 택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사랑하고 사랑하다가 그 다음에 안 되면 던져 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주시면서 그의 피로 우리의 그 모든 죄, 많은 죄, 패역한 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끔찍한 죄를 다 사하시고 끝까지 간섭하시어 마침내 우리를 그의 소유 삼아 우리의 마음을 받아내시고 우리의 성품을 받아내시고 우리의 인격과 진심을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자리로 돌려놓으시고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것이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계곡에 걸려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라는 구름이고 그 풍성한 은혜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속량하신 놀라운 구원의 내용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 풍성한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라도 유대인, 이방인 차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의 죄도 사하시고 그의 소유 삼으시어 이 일을 진행해나가심, 어떤 종류의 죄, 어떤 종류의 인생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 풍성한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남자, 여자, 흑인, 백인, 황인,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배운 자 못 배운 자, 건강한 자 약한 자, 차별 없이...

그리스도의 피는 무한정...씻고 또 씻어도 더렵혀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입니다. 그 샘에 죄를 씻으면 누구라도 정하게 되는 풍성하고 차고 흘러넘치는 보혈의 샘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가 죄인을 구속하여 그의 소유 삼으시는 유일한 원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은 그 풍성한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본주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인간 중심으로 인간위주의 이해 속에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영역, 특별히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인 구원의 개념에도 고스란히 들어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훨씬 중요하게 취급하는 경향들로 하나님의 구원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구원을 말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순종 사이에서 순종이 더 강조되는 경향은 이런 인본주의 사조와 무관치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순종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 인간의 순종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순종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시작된 구원이 취소되거나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어제와 오늘 아침 묵상이 노아의 방주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지어야 할 방주의 설계도를 주십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순종해서 방주를 짓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다고 했는데 세상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물은커녕 비도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시집가고 장가가고 밭 갈고 장사하고 별일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방주를 짓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제정신이 아닌 삶이 노아의 방주 짓는 삶입니다. 노아가 자기의 결심과 노력만으로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것을 은혜의 결과라고 이야기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보지 못한 심판을 믿게 만들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짓게 만든 원동력은 노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순종을 낫습니다. 순종이 은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맺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능력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순종과 의지와 노력의 무가치함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씌워주신 면류관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계4: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24장로들이 하나님의 씌워주신 관,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면서 영광과 찬송과 권능은 보좌에 앉은 하나님만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다 면류관을 벗어 던지게 됩니다. 면류관은 영광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씌워주시는 상급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받은 자는 그냥 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보면 압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고 순종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가고 보면 그런 자기나 그러지 못한 죄인이나 거기서 거긴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내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생명의 아들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나의 노력이나 나의 선행이나 나의 순종이나 나의 헌신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오래 참으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넘치는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대하시면서 거룩하게 흠이 없게 만들어 오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죄와 욕망으로 하나님이 입히신 세마포를 더럽히고 살지만 하나님은 매번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으로 이런 우리를 씻어 정결하게 하시고 세마포 옷을 입히시고 의의 옷을 입히시어 만들어오시어 마침내 영광스러운 입성으로 하나님 앞에 세워 면류관까지 주시는 분이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임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하나님이 씌워주신 면류관이라도 차마 못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벗어던집니다. 모든 인간의 자랑, 공로, 자부심 다 벗어던지고 오직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라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7:9-10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것이 은혜의 풍성함을 아는 자들의 찬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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