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을 아내와 자녀들과 한집에서 살았던 "비이성적 상황"

Photo copyright of the Karl Barth-Archiv in Basel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그의 부인 넬리(Nelly Barth Hoffmann, 1893-1976) 그리고 여비서 샤로테(Charlotte von Kirschbaum, 1899-1975)와 35년을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칼 바르트의 저술 특히 그의 대표적 <교회교의학>은 샤로테와 함께 진행하였다. 칼 발르트와 샤로테는 1924년부터 서로 알게 되었고(당시 샤로테 나이 25세), 1929년(샤로테 30세, 바르트 43세, 아내 넬리 36세)부터 칼 바르트 집에 들어와 함께 살면서 바르트의 모든 신학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바르트의 집에서 월급도 없이 가족처럼 지냈다. 그녀가 없었다면 바르트의 <교회교의학>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5년 66세의 샤로테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하기까지 35년간 함께 지냈고, 샤로테가 요양병원에 입원했을 때 칼 바르트 부부는 매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칼 바르트가 세상을 떠난 1968년 12월 10일 바로 하루 전에 마지막으로 샤로테를 방문했다고 한다. 칼 바르트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회른리(Hornli) 묘지에 안장됨으로써 82년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로부터 7년 후에 샤로테가 죽고, 그 1년 후에 칼 바르트 아내 넬리도 죽었다. 세 사람은 한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칼 바르트의 저술에서 여비서 샤로테의 역할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II>의 서문에서 그녀가 라틴어와 조사연구 방법과 함께 광범위하게 문헌을 조사한 것으로 제시하였다.

최근 칼 바르트는 자신의 여비서이자 리서치 도우미였던 샬로테와 연인관계였으며, 함께 살았던 칼 바르트의 자녀들은 그 상황을 "비이성적 상황"으로 기억한다는 기사가 올라와서 SNS 상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 기사를 쓴 사람은 이러 칼 바르트의 불륜적인 행적이 그의 <교회교의학>이 저술되었던 시기에 있었던 일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당분간 바르트의 신학에서 떠날 것이라고 했다.(Karl Barth and Charlotte von Kirschbaum: My Response https://growrag.wordpress.com/2017/09/30/karl-barth-and-charlotte-von-kirschbaum-my-response/ )

그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르트와 비서 샤로테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의심을 받음.

2. 샤로테가 바르트의 집에 들어와 바르트의 아내 및 자녀들과 같이 살게 됨.

3. 샤로테는 비서 겸 연구조교 그리고 연인이었다.

4. 이 일로 바르트의 아내와 자녀들이 큰 상처를 받음

5. 특히 바르트의 자녀들이 이 비이성적인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워 함.

6. 아내는 이혼을 결심한 적 있으나 자녀들 때문에 포기한 것으로 추론.

7. 바르트의 두 통의 편지를 증거로 제시함 - 그가 이 문제로 고민한 글.

8. 이 글을 쓴 이는 바르트의 이 불륜 관계가 교의학 저술 시기라 말함.

9. 따라서 그의 교의학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뉘앙스.

10. 글쓴이는 이 실상을 알고 바르트와 그의 신학을 버렸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들은 이미 에버하르트 부쉬가 쓴 바르트 전기에 일부 나와 있는 내용이라고 한다. 칼 바르트는 나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저항했지만 자신 안에 있는 욕구와 죄성 앞에서는 결국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일까? 칼 바르트는 죄론을 다루면서 인간의 부패한 죄성 그 자체보다 그 죄를 합리화하고 기만하는 것이 더 심각함을 지적한 바 있는데, 오히려 자신이 그런 오류에 빠졌다는 것은 무척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우리는 엄청난 저술을 남긴 세계적인 신학자의 최고 수준의 교리적 주장마저 자신의 잘못된 윤리를 교정하지 못하는 경우를 다시한번 보게 된다.

칼 발트(Karl Barth, 1886-1968) 연보

  •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Basel)에서 J.F. 바르트(Johann Friedrich Fritz Barth)와 안나 카타리안(Anna Katharian)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 1989년. 아버지가 베른(Bern) 대학교에서 신약신학 및 교회사를 가르치게 되면서 온 가족이 베른으로 이사하다.(바르트는 청소년기 전체를 베른에서 보냈는데, 이후 그곳을 대단히 행복했던 시절로 추억한다.)
  • 1892-1904년. 베른의 기독교 계통의 중등학교(Greies Gymnasium)에서 공부.
  • 1904년 9월 17일. 고등학교 졸업 국가시험(Abitur)에 합격하고 베른 대학에서 신학전공.
  • 1906년 베를린(Berlin) 대학으로 옮겨 공부함.
  • 1907년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 및 튀빙겐(Tubingen) 대학으로 옮겨감.
  • 1904-1908년 베른,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베른에서는 이마누엘 칸트에 몰두하고, 베를린에서는 아돌프 폰 하르낙의 수업을 열중해서 듣다. 마르부르크에서는 빌헬름 헤르만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마르틴 라데 교수 밑에서 『그리스도교 세계』의 편집 조교로 일하다.
  • 1909-1911년. 제네바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 일하다.
  • 1911-1912년. 25세의 나이로 스위스 아르가우 주의 자펜빌(Safenwil)에 목사로 부임하다.
  • 1912년 2월 25일. 아버지가 55살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다.
  • 1913년 3월 27일. 베른의 뉘데크 교회에서 넬리 호프만(Nelly Hoftmann)과 결혼하다.
  • 1914년. 큰 딸 프란치스카를 낳음.
  •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하르낙, 헤르만 등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전쟁에 찬성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큰 회의와 충격에 빠지다. 스승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학의 길을 모색하다.
  • 1915년. 스위스 사회민주당 입당(Aargau Kanton), 첫 아들 마르쿠스(Markus)를 낳음.
  • 1917년. 둘째 아들 크리스토프(Christoph)를 낳음.
  • 1919년 9월 22-24일. 베슐린 출판사에서 『로마서 주석』(Der Rmerbrief) 초판 출판.
  • 탐바흐(Tambach)에서 개최된 종교사회주의 전당대회에서 “사회속의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다.
  • 1921년. 괴팅겐(Gottingen) 대학교로부터 개혁 신학 담당 교수로 청빙을 받아 독일로 이사하다(1925년까지). 셋째 아들 마티아스(Matthias)을 낳음.
  • 1922년 『로마서 주석』 개정판 출판.
  • 뮌스터 대학교로부터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다.(1939년 취소되었다가 1946년 회복)
  • 1923년. 고가르텐, 투르나이젠과 함께 신학 잡지『시간과 시간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 창간.
  • 발트(괴팅겐)와 하르낙(베를린)의 서신 논쟁.
  • 1925-1929년. 뮌스터 대학교의 개신교 신학부에서 교의학과 신약성서신학을 강의하다.
  • 1927년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kf 출판(서설에서 교의학까지)
  • 1930년 본(Bonn)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부임하다(1935년까지).
  • 글래스고(Glasgow) 대학교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 수여.
  • 헝가리 사로스파탁(Sarospatak) 대학 명예교수로 추대 받음.
  • 샬로테 키쉬바룸(kirschbaum)이 연구에 참가함(1924년 첫 만남).
  • 1932년.『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1 출판.
  • 1933년 6월. 『오늘의 신학적 실존』(Theologische Existenz heute)을 쓰다. 이 글이 큰 반향을 얻어, 카이저 출판사에서 비정기적으로 출간되는 문집 시리즈를 동일한 이름으로 발행하기 시작하다.
  • 11월부터 트루나이젠(E. Trurneysen)과 함께 (Zwischen den Zeiten)에 실렸던 논문을 편집 수록함.
  • 1934년. 발트 주도로 작성한 “바르멘(Barmen) 신학 선언문”이 독일 개신교 교회의 제1차 고백교회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다.
  • 1934년 9월. 브루너(Brunner)와 신학 존쟁에서「아니다!」(Nein)를 쓰다.
  • 1934년 11월. 교수직을 박탈당하다. 독일 내에서 일체의 강연 금지 명령을 받다.
  • 1935년 6월. 베를린 고등법원이 지법의 선고를 파기하고 년간 봉급액의 1/5에 해당하는 액수의 벌금형이 선고됨.
  • 6월 25일. 바젤 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이사하다.
  • 1936년.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취득.
  • 예정론에 관한 논문 “Gottes gnadenwahl” 발표.
  • 1937년. 성 앤드류 애버딘(St. Andrew, Aberdeen)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 1936-1937년 헝가리와 영국을 여행하다. 애버딘 대학교에서 기포드 강의를 하다.
  • 1938년.『교회교의학』 I/2 출판.
  • 옥스퍼드(Oxford)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 바젤 신학부의 학장으로 취임하다.
  • 베른에서는 오랫동안 병상에 있던 어머니가 사망하다.
  •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하자 무장 지원병으로 자원하여 104일 동안 군복무를 하였다.
  • 1940년.『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I/1(신론) 출판
  • 1941년. 셋째 아들 마티아스가 등산 중 추락으로 사망(장례식 설교도 유명함).
  • 1942년.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I/2(예정론) 출판.
  • 1945년. 8월. 프랑크프루트(Farnakfurt)에서 열린 형제회 총회에 참가.
  • 8월. 트라이자에서 열림 교회 지도자 회의 참가.
  •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II/1 (창조론) 출판.
  • 1946년, 1947년. 독일 본(Bonn) 대학의 초빙 교수로 특강. 베를린, 드레스덴 여행.
  • 1948년 암스테르담 세계 교회 협의회 총회(WCC)에 참가하여 주제 강연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구원계획Die Unordung der Menschen und Gott Heilsplan)”으로 하다.
  •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II/2 출판.
  • 1950년.『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II/3 출판.
  • 1951년.『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II/4 출판.
  • 1952년. 영국에서 평화훈장 수여받음.
  • 1953년.『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V/1(화해론) 출판.
  • 195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 취득.
  • 1955년.『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V/2(화해론) 출판.
  • 1956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 아들 마르쿠스와 영국 여행을 하다. 변증법적 신학의 변모를 잘 보여주는 아라우 강연을 발표하다.
  • 1959년.『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V/3, 1-2(화해론) 출판.
  • 프랑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 1960년 8월, 발레 주에서 빌리 그레이엄을 만나다.
  • 1961년. 바젤 대학에서 여름 학기를 마치고 명예교수로 추대 받음.
  • 1962년 3월. 바젤 대학교에서 고별 강의를 마치고 은퇴 생활에 들다.
  • 미국을 여행하며 여러 대학에서 강연하다. 시카고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취득.
  • 1962-1965년 몇 차례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고 요양 생활을 함.
  • 1966년 5월(80세) 본 대학에서 평의회 명예회원으로 추대 받음
  • 9월. 로마 교황청을 예방함.
  • 1967년.『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IV/4(세례론) 출판.
  • “칼빈의 기독교강요”을 한 학기 강의함
  • 1968년 슐라이어막허의 『종교론』강의
  • 12월 9일, 82세의 나이로 바젤에서 영면(永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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