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개봉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지 않았다. 너무나 가슴 아픈 장면을 돈을 주고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 5.18은 상상이 아닌 실재에서 완료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5.18에 관련된 영화는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영화 <남한산성>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광해군’을 좋아한다. 그래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도 좋지 않다고 평가했다. 멋진 광해의 대사가 광해가 아닌 광대의 대사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직접 전장에서 실전을 경험한 유일한 왕, 광해를 표현한 영화 <대립군>을 오히려 좋게 보았다. 영화 <대립군>은 20세기 폭스사가 제작한 만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독특한 상상력이 있었다. 그것은 광해를 성공한 왕으로 투사하는 마감이었다.

조선시대 광해군(이혼, 李琿)은 선조의 뒤를 이어 15대 국왕에 등극했다. 광해군의 정치는 전장에서 생존을 겪은 뒤에 얻은 체득훈이었기 때문에, 책상머리 주자학의 경륜과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생존과 경륜은 개인의 생존과 경륜과 비교하기 어렵다. 선조의 신하들은 선조와 함께 전훈공신들을 배척했다. 서해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거들 떠 보지도 않았고, 후대 학자들도 소개하거나 어떤 평가를 하지 않았다.

필자은 언젠가 강화도를 여행할 때, 월곶리 연미정(燕尾亭)을 방문했다. 연미정은 역사적인 장소였는데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 때 조약을 맺은 장소라는 안내문을 보았다. 당시의 조약체결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강화도는 한양의 보장처인데, 가장 비밀스러운 보장처에서 가장 위험한 적과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인조가 망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에서 왜 인조는 강화도로 가지 못했을까? 그것은 이미 청나라에서 이미 방어 매뉴얼을 숙지했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난공불락 요새인데, 난공불락 요새의 문을 여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 인조 자신이다. 병자호란에 조선은 채 50일도 안되어 몰락하는 나약함을 보였주었다. 서해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경각까지 경험한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계책이 있었지만, 한 실패를 더해 두 번을 실패한 것이다.

능양군은 1623년 광해군을 반정(反正)으로 밀어냈지만(1608-1623), 광해군은 왕조 인물 중에 장수한 사람 중 한 사람(1575-1641)이다. 왜 인조는 반역군주 광해를 처단하지 않았을까? 두 호란(胡亂)을 바라 본 광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라의 극한 상황을 경험한 왕을 몰아낸 세력이 겪은 극한 상황에서 그들은 더 극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극한 경험에서 책상머리 주자학도들은 전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어떤 유연함도 없고 사대의 예(禮)와 군자의 예(禮)를 주장할 뿐이다. 생명은 단순한 수치 계산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인조는 왜 남한산성에서 47일 밖에 항전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실패(임진왜란, 정묘재란)와 실패(정묘호란) 뒤에도 전쟁을 준비하지 않은 왕의 말로였다.

청나라에 대한 항전을 주장했던 척화파(김상헌)들이 진정한 충신이었을까? 필자는 이런 논란에 더 큰 불편함이 있다. 유투브 영상(하늘수아의 소개)에서 김상헌이 안동 김씨의 원류라는 정보를 들으면서 좀 더 놀랐다. 이덕일이 쓴 <윤휴, 침묵의 제국>에서, 북벌을 위한 부국강병을 주장했던 윤휴의 주장을 보았다. 학창시절 국사수업 시간에 북벌론의 거두를 우암 송시열로 배웠는데, 이덕일 박사는 '윤휴'라는 듣보잡을 들먹였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척화파 김상헌의 배역을 맡은 배우에 대해서 필자는 별 심이 없다. 다만 이 영화에서 혹시 척화파의 김상헌이 멋진 충신으로 묘사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참으로 불편함이 있다. 국가는 이론이나 이상으로 운영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국가 지도자의 한 줄, 한 마디는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안녕과 생명에 치명적인 사안이 된다. 그러한 위기와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서생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 영화는 극명하게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서생의 가면의 극치를 보려한다면, 영화 <남한산성>은 추천할만하다.

필자는 역사의 교훈으로 가장 좋은 영화는 <대립군>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대립군>은 다큐멘터리 형식이 아닌, 팩션(faction)이 분명했다. 나약한 광해가 왕이 되는 스토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남한산성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전개할 것 같은 상상이 필자로 하여금 영화를 보지 못하게 했다. 왜 실패한 역사를 재현하려고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아픈 가슴을 후펴파서 극민들을 각성시키려는 의도인가? 조선시대 임금 가운데 선조를 생각하면 많은 답답함이 있는데, 그에 버금가는 왕이 인조 왕이다. 인조반정, 이괄의 난, 양대 호란, 소현세자의 죽음 등 크고작은 사건 일색이 인조의 일생이다. 혹시 영화 남한산성은 그런 임금 인조도 멋진 장면으로 포커싱했을 것 같아 불편하다.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총신대 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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