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식의 모체, 한국 개신교

-비폭력적인 자유-평화-민족의 민족운동 통해-

애초에 일제는 평양 대 부흥운동을 잘못 이해했었다. 일제는 장대현 교회 사태를 신비주의와 도피적인 미래주의의 종교운동으로 보았다.

그 당시 장대현교회 집회현장에 나가 감시했던 일제의 경찰 보고부터 그 잘못된 견해를 상부에 보고했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열정적인 기도와 회개와 그로 인한 인격의 대변혁은 왜경들의 눈에는 신비한 기적으로만 보였다. 그들에겐 그것이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도덕성을 지닌 정통한 사회통치권의 ㅌ안생으로 볼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칼과 강압으로 사회지배력 형성만 보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기독교가 샤마니즘화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그들 보기에는 개신교의 회개운동이 현실세계의 사회정의 실현과 관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하늘나라와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이 향도자들 집단의 등장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비폭력적인 희생제사’라는 독특한 발상(發想)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한국인들 자신은 아직 ‘이념화된 비폭력적인 희생제사’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는 한일합방(韓日合邦) 직후였으므로, 한국인들의 국가 주권(主權)회복의 개념은 동학운동과 안중근, 또는 김구스타일의‘ 무력(武力)에 의한 저항’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일제의 음모(105인 사건)로 기독교 지도자들이 비폭력적인 희생양으로 때마침 등장한 것이다. 그러자 이 향도역을 맡은 집단이 터트린 교회 설교의 핵심은 ‘민족과 하나님을 위해 나도 십자가를 지자!’는 외침이 되었다. 그래서 ‘비폭력적 정의실현’이라는 이념화된 소명의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 평양 대 부흥운동 이후, 한국의 초대 개신교 성도들에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불의(不義)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면서도 불의한 자를 씻어서 되살려내는 ‘대속(代贖)의 사랑’ 으로서 알려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제사를 제대로 치룬 희생적 사랑은 그 순간부터 죽음도 이기는 부활의 힘이 되고, 모든 불의를 심판하는 정의의 불꽃으로 화한다는 신앙을 유사(有史) 이래 처음으로 가져보는 감격 속에 있었다. 그랬으므로, 개신교 측의 민족 지도자들 설교와 연설의 핵심은 언제나 ‘하나님과 민족을 위한 십자가 희생’의 요청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 의식은 들불처럼 민중 전체의 가슴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일제의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는 한국기독교가 현실도피적인 카타르시스(대리만족)에 빠져간다고 보게 되었다. 거기에다 당시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몇 명의 선교사들이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을 고수(固守)하겠다.’는 뜻을 일제의 조선통감부에 전해왔다. 이로 인해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는 앞에서 말한 새로운 불씨 즉 ‘새로운 한민족 통합의식’의 씨앗들을 가볍게 지나쳐 보고 말았다. 즉 한국교회가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강요에 굴종한 것으로 착각했다.

그 오류(誤謬)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족의식의 불씨를 키워 전 민족의 가슴에 불기둥을 세우게 하는 기회를 갖게 했다. 그래서 평양의 그 부흥운동은 105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잠깐 사이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과를 초래할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개신교 민족운동 이념

한국 개신교는 ‘105인 사건’을 통해 집단적으로 일제 탄압의 첫 희생양이 되었다. 이 사건(1912년)은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이 단순한 혈연적 집체의식(集體意識) 수준을 벗어나 ‘목적지향적(目的指向的)인 이념집단(理念集團)’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 변화과정은 다음과 같다.

105인 사건은 천주교도인 안중근(安重根)이 이또오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또오가 죽게 되자, 일제는 이를 기회로 삼아 날로 확산되는 민족운동을 근절시키려 했다. 그런데 일제는 이 수사과정에서 평양 부흥운동의 셩격을 처음에 잘못 파악했음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국내 민족운동의 핵심적인 주축이 개신교임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 지도자들을 일차적인 제거대상으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일제는 한일합방 직후의 첫 ‘내란음모’ 죄를 조작하였는데, 그것이 소위 ‘105인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물론 이로 인해 옥고(獄苦)를 치룬 이들 대부분이 개신교 지도자들 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고난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일제의 적의(敵意)가 나타난 것으로 보게 되었다. 또 전 민족은 이 수난자들을 보고, 그것을 민족 지도세력의 존재징후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비폭력적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로 인정되었고, 드디어 희생양적 수난까지 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이 운동에 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의식(意識)이 팽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개신교는 이 새로운 민족의식을 키우는 모체(母體)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며, 급속히 전국적으로 확산해 갔다.

평양 부흥운동은 안중근의의거(義擧)와 더불어 이 105인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었다. 그랬기 때문에, 새로운 민족의식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확산되는 그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은 자연히 새 민족운동의 향도(響導)역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일제에 의해 벌어진 105인 사건은 이 들불 위에 휘발유를 뿌린 결과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비폭력적인 사회정의운동이 인도의 간디 영향을 입은 듯이 말하지만, 간디는 이 때만 해도 남아연방에서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하던 때였다. 아직 그 소문이 한국은 커녕, 선진 서구열강에게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때이다. 그 당시의 희생양들과 민족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운동에 직접 참여했거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이 부흥운동이 새 민족의식에 끼친 새 이념과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이 세계는 절대진리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으로 지으셨다.
  2. 예수께선 이 사랑을 배반한 인류를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하셨다.
  3. 인간은 예수를 좇아,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4. 모든 인간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 신앙과 도덕적 원리에 따라 심판된다.
  5.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는 이 심판의 대상이다.
  6. 한민족은 이 일제와 서구열강의 악을 거부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7. 이 권리와 의무의 이행(履行)은 십자가 희생의 원리를 좇아야 한다.

앞으로 개신교에 의해 새로이 등장한 이 민족운동 이념을 편의상 ‘개신교 민족운동 이념’이라 명명(命名)하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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