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민족운동 행동강령

개신교 민족운동 행동강령

이 개신교 민족운동 이념은 105인 사건 이후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서민과 양반을 <일체화 – 조직화 - 체계화>를 갖춘 통합된 민족의식을 형성하게 하였다. 거기에다 이 이념은 새로운 민족통합 세력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일제와는 전혀 차별화된 내용의 통일된 가치관을 체계화시키게 되었고, 차별화된 자세로 일제를 포함한 서구 외세를 상대하게 했다. 이런 점은 한미족이 이념화된 가치관을 가지고 존엄스런 주체성을 스스로 내세우는 기반이 되었다. 일제는 물론, 중국이나 서구 외세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차별화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주체성의 확립과정은 동시에 새로이 ‘현대화된 한미족 정체의식(正體意識)’ 즉 민족 아이덴티티(Identity)의 형성과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나의 통합된 가치관으로 함께 행동을 하는 공동체의식을 낳기도 했다. 한민족은 특히 자신을 일제의 침략성과 차별화하면서 이 과정을 거쳤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당시에 자신을 일제의 실상과 어떻게 대비(對比)시키면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나갔는지, 일별(一瞥)해 보기로 하자.

일제는 서구에 대해 처음부터 ‘패권지향적(覇權指向的)인 수용태세’였다.

즉 서구의 식민제국주의와 군사기술 문명은 받아들이고, 기독교 정신문화와 인도주의적 윤리관은 배제(排際)하였다. 일본의 지배 엘리트들은 자신들 국민의 인권에 대해 모멸적인 자세였고, 그 국민들은 군국주의(軍國主義) 체제하에서 전쟁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에 대해 저항이 없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은 나치즘 치하의 독일 민족과 더불어 그들의 권력 엘리트들의 전범(戰犯) 행위에 즐거이 동참하는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삼일운동 이전까지는 일제가 이런 체제로 나갔어도,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列强)과 더불어 연합국 입장에서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나아갔다. 이렇게 역사가 전개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서구 열강은 그 제국주의의 야욕을 인한 상호간의 경쟁과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마지막 먹이가 될 수도 있는 거대한 중국대륙을 두고 치열한 경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 새로 제국주의 경쟁상대로 일어선 러시아가 지정학(地政學)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이용하여 거칠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그들은 유럽 본토에서도 신흥(新興) 제국주의 국가 독일(獨逸)과 충돌하며 유럽에서의 힘 겨루기에도 나선 것이다. 즉 러시아와 독일은 여탸 제국들에게 골치거리였다. 결국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기까지 했다.

이에 서구 열강은 세계대전 같은 재앙 이전에 그것을 예방하면서도 자신들의 중국 정복에 도움을 주는 전략을 짜냈다. 그것은 일본을 청(淸/中國)과 러시아에 대한 전쟁 하수인(下手人)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일본을 서구식으로 무장시키고, 전비(戰費)까지 대주며 이들과 전쟁을 하도록 유도(誘導)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과 거래에 나선 그들은 전쟁터를 중국과 러시아의 동쪽 관문이 되는 한반도(韓半島)로 지목했다. 그 대신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 국경은 범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달린 거래였다. 그 당시 영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미일(美日) 간의 ‘가쓰라-태프트 조약’은 이를 실현시킨 추악한 국제거래를 드러내주고 있다.

2차대전 후의 뉘른베르크 재판의 기준이 되고 UN 인권헌장(人權憲章)의 기초가 된 ‘반인류적(反人類的) 범죄’의 개념에 따른다면, 서구의 일본 사주 집단과 일본 제국주의는 이미 이 때부터 분명히 1차적 범죄국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민족은 이 당시부터 이러한 일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우선 서구문화에 대해서, 일제와는 달리, ‘인도주의적(人道主義的) 수용태세’를 취하였다. 개신교를 통해 서구의 기독교 신앙과 윤리 및 과학기술 문명은 적극적으로 수용(受容)하였다. 하지만, 식민제국주의와 독재체제는 단호하게 배제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민족은 일제에 의해 주권을 탈취당한 상황 하에서도 ‘자유-평화-민주를 지향하는 독립국가’의 꿈을 가꾸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이 꿈과 더불어 한민족의 고질적인 질병이었던 계급의식과 차별대우 전통이 교회를 중심으로 전면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대로 교회 내에선 이것이 조용히 진행되고는 있었으나, 이것이 이토록 급한 물살로 전 한국사회를 휩쓸게 될 줄은 누구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물결은 단합된 민족의식을 성장시키고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서민과 양반이 그 계급적인 차별의식이나 차별대우를 허문다는 것은, 아무리 민족독립이라는 과제를 위해서일지라도,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는 양반 측이나 서민 측이나 모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국 개신교 내에서는 그 교리와 공동체의 체질 때문에 이 일이 조용히 그러면서도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용한 혁명’이었다. 여기에서 민주화된 민족통합의식이 제대로 출발하고있음을 본다.

그런 상황에서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양반들의 도태(淘汰)가 눈앞에 확실해지자, 개화의식(開化意識)이 양반들에게도 퍼지게 되었다.그리고 양반들 가운데 특권의식을 허물고 나오는 이들도 많았다. 이를 기회로 개신교의 민족 지도자들은 전 민족을 적극적인 책임감과 의욕을 가지고 그 민주화된 민족 통합의식 방향으로 이끌었다.

애초에 개신교와 민족 지도자들이 공통되게 부르짖은 메세지는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그것은 어떤 사회나 국가라 해도 그 백성들의 생존권과 인권만은 보장해야 존속할 가치가 있다는 신념의 토로였다. 모든 통치권의 정통성은 이 가치를 위해 정당한 절차를 밟아 헌신할 때에야 확보된다고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민족은 국내에서 더 이상 계급, 지연(地緣), 학연(學緣), 재산, 서얼(庶孼),… 따위로 인간 차별을 해선 안 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더구나 외세(外勢)에 의해 민족 생존권과 주권을 박탈당하는 일은 더욱 용납해선 안 된다고 단호한 태도로 천명(闡明)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메세지 요지이다.

이로 인해 개신교 밖의 일반 백성들까지 교회의 메세지를 따르게 되었고, 한국내의 타 종교까지 지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동학(東學)의 후속(後續)종교인 천도교(天道敎)조차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의 독립운둥은 ‘자유-평화-민주를 지향하는 비폭력적 민족운동’으로 방향을 잡는 거대한 바람이 일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한국 개신교는 한민족 양심의 상징으로 화해 갔다.

그 당시 한국 개신교 인구는 전 한국 인구(1500만)의 1.5%에도 못 미쳤고, 세례교인 수는 0.2%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전 민족을 이끄는 도덕적 리더 그룹으로 부상(浮上)하여, 결국 삼일운동까지 일으키는 주도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그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한민족 양심의 상징으로 인정받을 만큼 헌신해온 그 동안의 역사와 설득력 있는 메세지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회 밖을 향한 이 설득력 있는 메세지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당시 한국 교회의 감동적인 설교였다. 그 설교의 핵심이 처음 터진 사건이 바로 평양 장대현교회의 부흥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의 바람이 삼일운동으로까지 상승하도록 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그 메시지는 개신교가 그 당시의 백성들에게 순교적인 열정으로 외치며 확산시킨 민족운동의 행동강령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모든 인간행위의 동기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하나님의 사랑(人類愛)이어야 한다.
  2. 서구 및 일제의 식민제국주의와 그에 편승한 서구교회의 행태(行態)는 범죄이다.
  3. 한국 기독교는 고난당하는 하나님 자녀들(백성)의 어머니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4. 한민족은 그 생존과 인권을 위해 ‘비폭력적인 정의’를 실현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

 

이 행동강령은 위의 ‘개신교 민족운동 이념’과 더불어 삼일운동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 국시(國是)의 핵심이라는 것도 인정할 것이다. 이 중요한 행동강령을 앞으로 ‘개신교 민족운동 행동강령(行動綱領)’이라 칭하기로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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