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21)-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인류 조상들의 이야기는 창세기 5장에 나온다. 자녀들을 낳고 몇 세에 죽었다는 식의 족보 이야기다. 타락한 인류의 계보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기회를 주었건만’ 저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아들딸 낳고 그저 사는 데에만 바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군상(人間群像)마다 잘살아보려고 애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듯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가슴을 닮은 이미지대로 지으시고’(1절),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는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지칭하셨다’(2절). 사람이라 지칭하심은 하나님께서 뭔가를 기대하셨다는 말이다. 사람의 본분이 남아있기를 바라심이다. 감사의 사람이기를 소망하셨다. 또한 감사의 제사를 고대하셨다는 말이다.

아담은 백 서른 살에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 그 성품과 모습이 자신을 빼닮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셋이라고 했다. 셋을 낳은 뒤에 그는 800년을 더 살면서 자녀를 낳았지만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채 살다가 930년을 살고 죽었다. 그의 아들 셋도 아비를 따라 자녀만 낳았지 하나님께 감사 한 번 하지 못한 채 912년을 살다가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에노스, 게난, 말할랄렐, 야렛, 므두셀라, 라멕까지 그들도 그렇게 또 그렇게 살다가 죽어갔다.

하지만 에녹(Enoch)만큼은 달랐다. 분명 선조들과 달랐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22절).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다. 특히 에녹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사람이 부부간에 충분히 사랑하며 자녀를 낳고, 애정을 나누면서 이 땅에서 살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뭔가 큰 시사점을 던져주는 구절이다. 최초의 인류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사람이라 칭하실 때 이미 하나님과 교감을 나누며 살도록 허락받았다. 이름하여 감사생활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베풀어주셨다. 아낌없이 말이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없다. 인간에게 무엇을 바람도 아니다. 다만! 다만! 인간에게 바람은 한 가지 감사였다. 감사의 제사, 감사의 언어, 감사의 생활, 감사의 후손들로 이어가길 소망하셨다. 에녹만큼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감사에 성공한 인물로 생각해본다. 너무나 귀하여 이 땅에서 물들기 전 하나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셨던 것이다.

왜! 성경에 나타난 인류의 조상들은 그 귀한 기회들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을까? 세상의 일과 땅을 일구는 일에만 몰두했을까? 사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었다. 사람의 눈과 입과 귀를 사로잡는 것들 말이다. 저들은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땅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당시 인간을 현혹하는 것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독되면 죽는 줄도 모른다. 사업이 망하는지도 모르고 한눈을 판다. 위기가 오고 부도가 임박하는데도 여자(情婦)에 눈이 멀면 딴살림을 차리고 들락거리며 향락을 즐긴다.

이렇게 유추해 본다. 광산의 황금, 술집과 성매매, 카지노와 도박, 국제무역이 중계되는 큰 거점(항구)에는 대개 이런 시설이 위치해 있다. 물산과 물류, 돈, 술과 술집, 퇴폐시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차고 넘친다. 거기에 카지노까지 있다. 카지노에는 전략적으로 3가지가 없다. 첫째가 시계인데, 시계는 정한 시간, 타인과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빠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창문인데, 가정이나 일상 환경을 볼 수 없도록 창문을 내지 않는다. 셋째는 거울인데, 자신의 얼굴이나 초췌한 모습을 볼 수 없도록 카지노엔 거울이 아예 없다. 이 세 가지를 철저하게 숨김으로써 도박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인간의 생각을 빼앗고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유인하는 것으로 심리학에서 차용한 철저한 마케팅 전략이다.

필자의 상상이지만, 인류 초기에도 인간을 몰두케 한, 중독이 들게 할 만한, 인간을 홀리는 뭔가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정확 치는 않으나 시사점은 있다. 남자들이 예쁜 여성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부자들은 아내를 여러 명씩 둘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성을 상품화해서 파는 산업이 발달했다든지, 여성을 소유하고 더 많이 차지하려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다.

‘남자가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 6:2)고 전한다. 남녀관계에 심상치 않은 문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3,4절을 건너면 매우 심각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창 6:5)는 하나님은 ‘땅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였다’(창 6:6), 더욱이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려야겠다’(창 6:7)고 작정까지 하셨다.

하늘도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까지 생각할 수가 있을까. 하나님을 기억했다면, 하나님을 묵상했다면, 누군가는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감사하며 더욱 복된 삶을 누렸을 텐데 말이다.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연관어(聯關語)를 살필 때, 그의 사고, 행동, 제사와 삶의 태도 등 어떤 것에도 감사란 단어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감사생활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감사생활을 빼고 에녹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에녹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 때문에 바빴다. 흡사 홀린 사람들 같았다. 혹자는 ‘내가 바쁜 사람인데 짬을 내어 이곳에 왔다’며 ‘바쁨을 가지고 자기를 스스로 지체 높은 사람인양’ 자랑하는 축들이 있다. 이웃을 돌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한 채 바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도 않다. 너무나도 바쁜 사람은 감사할 수가 없다. 범사에 감사하고 감사로 예배하는 일은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매우 바쁘기만 한 사람은 하나님에겐 필요치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제사 때문에 짬을 내기 어려운 그 바쁜 레위인을 향하여 성경은 말한다. ‘아침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양하라’(대상 23:30)라고. 바쁘다고 감사를 잊어선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하며, 감사는 언제나 시간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의 본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네가 레위인이라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제사에 관여하는 사람이라고 특권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어떤 누구도 감사에는 예외가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성경이 요청하는 감사는 ‘범사에 감사할 것’을 언급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여기서 ‘범사’(All circumstance, NIV)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를 막론하고 사용되는 개념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여유 있을 때나 피곤할 때나, 인생에서 실패했을 때나 성공했을 때나 그 어떤 시간마저 포함하는 단어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감사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이를 세심히 살펴보면 감사가 예배의 중요 요소임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아니다. 감사는 인간의 삶 가운데에 늘 존재해야 할 성격이다. 인간의 본분을 말할 때마다 감사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그 하나님을 대할 때,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이 바로 감사임을 잊지 말다.

그런데 창세기 5장과 6장을 보면,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였다거나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제사하였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먹고사는 이야기, 남녀가 결혼하였다는 이야기, 몇 살에 아들을 낳고 자녀를 낳았다는 이야기뿐이다. 아니 남자들이 분에 넘치도록 예쁜 여자들을 마음대로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는 이야기뿐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

이러한 인간 군상(群像)들의 추함을 보고는 여호와께서 경고하셨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창 6:3). 수백 년씩 살던 사람들의 생명을 백이십 년으로 단축시켰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인 경고 조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자,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반복해서 한탄하였다’(창 6:6,7)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인간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모두 악할 뿐임’(창 6:5)을 보시고 난 뒤의 일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되는 특별한 남자들마저도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욕정이 불 일 듯하여 좋다고 생각되는 여자를 마구마구 아내로 삼았고(창 6:2), 자식을 낳기에 바빴다(창 6:4).

하나님을 경배할 시간이 없었다. 감사할 의도도 없었다. 아니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시대적 흐름이 그러했다는 이야기다. 아무도 드러내 놓고 하나님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중에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도 있었다.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노아도 있었다. 세태 모두가 한 흐름으로 내달렸기에 그 큰 거대 물결을 저들이 거스르기엔 역부족이었다. 해서인가 에녹은 데려가셨고, 에녹이 없는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잠시 지켜보았지만 역시나 인간의 근성은 악하여 돌이키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보셨다. 몇 세대 후 노아를 새 시대의 인물로 지목하셨다.

필자는 인류의 조상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왜 복의 기회를 얻었으나 누리지 못했을까? 신학적 관점으로 볼 때엔 인간의 죄와 악의 문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감사(感謝)의 관점(觀點)으로 보면 감사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본다. 감사에 문제가 생기고 구멍이 생겨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을 힘입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할 것’을 권면한다. ‘말에나 일에나 무슨 권능이든지’ 오직 능력의 출처가 하나님이심을 언급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는 어떻게 험난한 로마제국의 핍박과 고난의 방패를 뚫고 헤쳐 나왔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