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과 배제의 긴장을 잘 헤쳐나가야 할 시절

신학자가 본 동성애자들의 출현

6, 7년 전쯤인가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서 동성애적인 모티브가 안방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아주 최근에는 박찬욱의 영화 <아가씨>에서 노골적으로 페미니즘적인 동성애를 예찬하는가 하면, 이런 분위기를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적인 대안을 찾아내려는 노력에서 동성애자였으나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영문학자 로자리아 버터필드의 경험을 담은 <뜻밖의 회심>과 같은 책이 기독교출판사를 통해서 번역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어제와 같은 동성애자들의 모임과 그 반대 모임을 진즉 예고한 측면이 없지 않다. 목도하듯이 이것은 현재 한국사회를 휘몰아치는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미국의 장로교회가 동성애 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미국의 감리교단에서 동성애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커밍아웃을 선언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교회의 현실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사실 나는 이것이 더 걱정스럽다.

나는 유학생활을 하면서 전공과 관련하여 한 신학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동성애자였다. 자신의 연구실에서 나를 만나준 신학자는 건장한 체구에 럭비 꽤나 했음직한 포스를 느낄 수 있었고, 그와의 대화 가운데 자신이 동성애자요,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사실 적잖이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신학을 하고 처음 외유를 한 곳이 남아공이었고, 남아공은 주일이면 교회 출석하는 비율이 인구의 80%를 상회하는 곳이었으니,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났었다. 그와의 한 번의 만남은 나중에 마트에서 그의 파트너와 나란히 손을 잡고 물건을 사는 모습을 보고 안부를 주고받는 것으로 아예 끝났다.

그리곤 유학지를 남아공에서 화란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또 한 번 낯선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동성애자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홀로 화란에 도착해서 집을 얻는 과정에 집회사로부터 집을 하나 추천을 받았고, 그 집을 계약하기 전에 실내를 돌아보고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것이 관행인지라, 집회사로부터 받아든 전화번호를 따라서 전화를 했다. 집 내부를 좀 보고 싶다고 했더니 자신의 아내가 몸이 좋지 않다고, 일주일 후에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기에, 통상적인 일 수라고 생각하고 그러마했다. 일주일 후 그 집을 방문하니 백인 남성이 나를 반갑게 맞으면서 인사를 나누었고, 이윽고 로비 부엌 쪽에 있던 흑인을 가리키면서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를 하는데, 그가 날씬한 체구를 지닌 남자였던 것이다.

소개받은 집이 워낙 깨끗했고, 타운하우스에 가까운 일층 부엌 겸 거실, 위층 침실의 복층구조도 맘에 들어서 계약을 하고 입주를 하게 되었다. 입주하는 과정에 전에 살던 동성애 커플(?)로부터 부탁을 하나 받았다. 우편물을 받을 주소를 가능한 범주에서 미리 정리를 했는데, 혹 편지가 오면 자신의 주소로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싶어, 약속을 했고, 단 6개월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6개월간 그 약속을 지켰으나, 그 이후로도 편지가 이곳저곳에서 왔다. 이따금씩 배달되는 편지를 보관을 해 놓고 생활하던 어느 날, 편지 내용이 궁금했고, 그래서 그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열게 된 손으로 쓴 편지 내용을 통해서 이 집에 살던 동성애자들이 미국인임을 알았고, 또한 그들이 동성애자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편지는 일상적인 수준의 안부를 묻는 그리 심각한 내용은 아니었는데, 전반적인 분위기는 신실한 신앙인의 입장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성도의 문안에 가까운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편지는 항상 “주 안에서 사랑하는 누구,,,로부터”의 형식으로 끝맺음을 했다.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시골에서 자란, 그리고 청년시절을 비교적 경건하게 보낸, 남녀가 유별한 나라에서 성장한 사람으로서 참 낯설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는 정죄의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내가 유학했던 화란은 동성애 올림픽이 개최되곤 했던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나라였으며, 일반적으로 유럽이 전반적으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19금 잡지를 그냥 드러내놓고 판매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성적인 금기와 같은 것이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외국에서 그랬듯이 “퀴어축제”와 같은 것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례 없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소중하게 여겨온 미풍양속을 해치는 패악한 행동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고유한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율법을 자연법으로 확신하고 따라서 교회나 사회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통합적인 관점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형성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 같은 장로교인의 눈에는 도무지 참아 견디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도 60대 이상의 연령대를 넘어선 분들에게는 동성애는 마귀 짓에 지나지 않는,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당장이라도 쏟아 부어질 듯한 사건으로 여겨질 것이다. 나는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에 반한 죄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러한 동성애가 합법화되지 않도록 최선의 다양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일을 위해서라면 종교를 떠나서 보편적인 인간의 심성에 호소하여 어떤 연대를 이루는 일도 전략적인 면에서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직접 나서서 입장을 표명하기보다는 유기적인 교회의 지체들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하고 집중력 있게 움직여야 한다고 본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인들도 입법의 과정에 자신의 고유한 의견이 배제되지 않도록 신중한 전략을 짜야 한다고 믿는다. 과연 소수자 보호법이라는 것이 입법화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자꾸 생겨나기 때문이다. 한국이 과연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나 러시아처럼 분명하게 국가가 나서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저런 눈치들을 보면서, 혹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드러나지 않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내재된 힘을 앞세워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소수자의 인권을 빌미로 실제적인 입법에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의 선례를 조심스레 분석하고, 소수자의 인권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교회는 자신의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손상되지 않게 그리고 자유롭게 낼 수 있고, 또한 그런 소리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법적인 안전장치를 더불어 마련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계속해서 증가할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적으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어떤 “목회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가, 예수당대의 유대교처럼 문둥병자들을 분류하여 격리 조치하였듯이, 동성애자들을 격리 조치하도록 운동을 할 것인가? 이것은 목회적인 면에서 볼 때, 올바르지 않다고 본다. 본래 복음은 누구에게나 들려질 수 있어야 한다. 창기든 세리든 고위공직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가리지 않았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복음을 누구에게나 전해야 한다. 장로교인들에게서 칭의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에서 기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떤 종류의 죄악이라고 하더라고 그 죄를 덮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만큼 층분히 만족한 속죄를 이루신 분이시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동성애자들을 향해서도 들려져야 한다. 목회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동성애자들을 애초부터 배제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이들을 향해서, 동성애를 그치고 거룩하게 된 후에 오세요라는 장벽을 쳐두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장로교회는 동성애자들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일과 관련하여 아무런 장벽도 놓지 않는다. 사실, 이 만남이라는 것도 한 순간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뜻밖의 회심>의 저자의 사례에서 보듯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일어나는 경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은혜의 수단에 대한 구별된 이해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은혜의 수단 가운데 세례와 성만찬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함께 삶의 변화가 수반된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인데 반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그런 변화가 수반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직 수반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의 개혁신학자들의 생각이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동성애자들에게 배제되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은혜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의 두 요소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앞에서도 밝혔듯이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이 들려질 기회를 박탈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성경을 따라서 죄인 것을 또한 인식할 수 있는 틀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여기에는 성급한 회심을 위한 강요와 같은 비인격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는 지혜가 필요하고, 인내와 섬김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관한 깊은 인격적 설득은 필요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성례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다. 한국교회는 성례를 강화하고, 회중의 성결을 도모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적어도 거룩한 삶을 향한 열망이 시작되고, 그 삶의 실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서 세례와 성찬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성애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발견하여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하지만, 이들이 실질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고 믿는다(동성애교회 운운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은 불문가지다). 물론 여기에는 동성애자들의 성숙한 정직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동성애자들도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취향이 존중될 것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정체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런 차원에서 말씀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으나 성례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본다.

나는 신학을 하면서, 특별히 외국에서 신학을 하면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교회와 신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고, 어떻게 교회가 (동성애공동체를 포함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리는지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어떻게 동성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성애자로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조금 알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들이 어떻게 그 문제에 신학적으로 접근하게 되는가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동성애가 교회 안에 수용되어지는 과정에는 칼 바르트의 화해론을 변용하는 극단적인 흐름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칼 바르트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태도일 것이지만, 나는 칼 바르트의 화해론을 전후 문맥을 배제하고 끝까지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이렇게 변용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유럽에서 한 신학자와의 개인적인 대화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한 바가 있다.

칼 바르트의 화해론에는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치열하게 인간의 죄에 대하여 다투는 열의가 반영되어 있다. 바르트는 그 싸움의 치열함만큼이나 죄를 심각하게 다루었다. 그래서 그 죄를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다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담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죄를 둘째이자 마지막 아담인 예수에게 정하신 하나님은 그 예수를 심판하심으로써 모든 인류의 죄를 궁극적으로 심판하셨고, 따라서 각자의 모든 죄로부터 각자를 해방하여 무죄로 방면하셨다. 또한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죄와 상관없는 의로운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 한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인의 죄가 처리되었고, 동시에 의로운 자로 받아들이셨음으로, 모든 죄인은 원리상 칭의되고 동시에 성화된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사건에서 동성애자도 열외가 될 수는 없다.

칼 바르트에게는 칭의는 곧 성화다. 계시는 곧 부름이기 때문이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이 말은 어떤 인간적인 의도 첨가되거나 덧칠해질 수 없다는 의미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사실상 충족하였기에 율법을 따르는 삶도 배제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루터식의 급진적인 칭의이기도 하고, 바르트는 이것을 양차세계대전후 양분된 사회의 칭의와 화해를 위한 구조로 새롭게 개진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이 논리를 조금 펼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칭의되고 성화된 자가 주일 예배를 드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가게 된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은 죄와 악으로 오염된 곳이어서, 이곳에서 체류하게 되면 누구나 죄에 오염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렇게 죄와 엮여 살다가 주일이면 다시 교회에 오게 되고, 칭의는 곧 성화라는 바르트의 화해론에 근거한 설교를 통하여 자신의 칭의와 성화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는 또한 그런 상태로 월요일을 시작하지만 토요일이 되면 다시 죄와 악으로 점철된다. 이런 모습으로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게 되고, 그는 다시 칭의는 곧 성화라는 메시지를 접한다.

칭의는 곧 성화라는 이런 순환구조는 어느 순간 내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결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뛰어봐야 벼룩이구나” 하는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냥 죄에 거하다가 주일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는 곧 성화라는 깔끔한 처리방식을 통해서 정리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자기 합리화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르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바르트의 화해론 논리를 치밀하게 끌고 나가는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신학적인 지점인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오늘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회의 젊은이들에게는 생수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도덕적 무감각이라는 올무에 걸리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후에도 비디오 예배를 가능하게 한 모 인사의 설교가 정확히 이 지점을 붙잡고 순환한다.

동성애도 이 순환의 고리에서 예외로 간주될 이유가 없다. 동성애자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는데, 그 분 안에서 칭의되고 성화된다. 그리고 회개의 합당한 절차가 없이 동성애자로 영구히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되는 논리적인 구조 안으로 포획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인 구조 안에서 동성애 목사가 생겨날 수 있고, 동성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들어 그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성화를 칭의 안에서 해소해버리는 일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들은 칭의하고 성화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이 구조 안에 서게 되면 아무도 자신을 비난할 수 없는 지점을 확보한다고 스스로 믿게 되기 때문이다. 성화의 정당한 자리가 칭의와 구별되어 설정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불행한 결론인 셈이다. 이런 류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구원파다.

칭의는 곧 성화가 아니라, 칭의는 곧 한 인간을 성화에로 확정하는 것임을 잘 깨우쳐야 한다. 칭의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갖고 성령의 내주를 갖게 되면, 그는 성화를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칭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선 자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성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 삶의 근간은 십계명에서 구성된다.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확증한다기보다는 십계명 앞에서 자신을 부단히 비추어야만 인간은 자신이 성화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십계명은 성화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내포하는 의미 앞으로 칭의된 자가 다가서고, 그 환한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야 자신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성화를 급진적으로 칭의와 붙여놓고, 여기에 율법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마침내 폐기된 것처럼 가르치게 되면, 아무리 성령의 사역을 이야기 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정상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게 된다.

목회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동성애자를 단순히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하여 칭의의 복음 안에서 마음을 열고 다가서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실존적이면서도 친밀감 있는 적극적인 교제를 해야 한다. 마치 예수께서 창기와 세리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세리와 창기로서의 삶을 마치 합법적인 것인 양 위장하는 방식으로 칭의를 확장하면 곤란하다. 동성애자로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사귐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는 이런 비정상적인 삶에서 즉각적으로 혹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벗어나야 한다. 창기의 삶을 버리고 재활의 기회를 찾아야 하며, 세리장 삭케오와 같이 불법한 일을 회개하고, 그 안에서 직업적인 정의를 세워야 하는 것이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죄인도 칭의될 수 있으나, 칭의된 후에는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일관된 태도이다. 교회는 이런 차원의 긴장을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구별과 통합을 통해서 잘 보존하면서, 시대적인 문제에 대한 지혜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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