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한국교회에서 꾸준히 대두되는 문제 중 하나가 목사가 행하는 ‘설교 표절’에 대한 문제이다. 필자는 목사로서 “과연 설교를 표절하는 것이 나쁠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일단 목사의 설교는 전달자의 인격이 묻기 때문에 문장은 표절할 수 있지만, 전달에서 인격까지 표절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교를 표절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표절한 그 인격에 문제를 두는 것이다. 표절한 목사의 인격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먼저 쌩뚱맞게 “표절될 수 있는 설교”에 문제점을 제시해 본다. 어떻게 설교문을 만들면 상대방이 표절할 수 있을까? 그 설교가 좋은 설교가 아니라, 일반적인 내용의 설교라야 가능할 것이다. A 교회에 적합한 설교가 B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A 교회 설교가 일반적이고, B 교회도 일반적인 교회인 것이다. 일반적인 교회를 좀 더 위험하게 표현하면 영혼이 없는 교회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곳은 표절설교가 아니라도 여러가지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교회이다. 

그런데 설교 표절을 적발하고 지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교를 표절하는 것이 충격이었기 때문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지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설교가 윤리적 행동인가?”라고 질문하면 또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윤리적 행동이 아닌 행동에 윤리적 잣대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윤리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고 말해도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설교는 윤리적 행동이 아니다”는 것이다. 설교 표절을 윤리적 문제로 매도시키지 않도록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는 학문 행동도 아니다. 학문에서 표절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런데 학문 기관에서도 실천적인 연구 과정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좀 더 느슨한 규정을 둔다. 학문기능을 약화시키는 연구 규약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는 학문 행동도 아니다. 칼 바르트는 설교를 듣고 판단하는 것을 학문 행동이라고 규정했다. 설교 문장에 문제의식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설교 표절’이란 말을 들을 때 마다, 필자는 설교 만드는 과정의 고충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목사가 설교를 일주일에 몇 편을 만드는가? 대형교회 목사는 한 설교로 2회 이상을 하는데, 한 설교로 한 번 설교하는 과정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대형교회 설교를 대부분 표절한다. 그런데 대형교회 설교는 일반화된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반화된 문장은 창작이 아닌 문장 조합으로 구성한다. 간혹 대형교회 설교에서 영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설교가 있는데, 필자는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은 영혼과 충돌하기 때문에, 개인의 영혼을 실은 설교에 대형군중이 회집하기 어렵다. 대부흥운동에 회집한 많은 군중은 일시적인 군중이었지 항속적인 무리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설교 작성은 매우 어렵다. 신학훈련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신학훈련은 오직 이론훈련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신학대학원을 수료하면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면 설교를 작성할 수 있을 줄 알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신학대학원 교육체계로 설교 만들기는 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론수업을 포기하고 실천훈련 체계를 이룸을 목표하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이론학문을 도외시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수 없는 이론 수업을 이수하지 않는 이상 설교 작성은 불가능하다. 설교는 실천이 아니고, 논리를 근거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설교학을 공부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도 나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교학 박사가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설교학은 절단 수단을 연구하는 것이다. 설교 표절은 수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문장을 표절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문장을 만들지 못하면 설교를 못하는 것이고, 다양한 도구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목사들에게 설교 작성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 그래서 복음설교를 많이 읽고 잘 인용하고 조합시켜 복음설교 문장을 만들도록 권면한다. 설교 작성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어떻게 해야 하나? 신학교 다닐 때 양심적으로 설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토론한 적도 있다. 목사가 되니 사역에는 양심보다 우선한 사역자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다. 목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목사는 복음을 원하는 성도에게 자기의 순수한 양심보다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명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실력이 통탄할 수 밖에 없는 지경이다. 그러니 불충한 사역자의 눈물이 심장을 적신다.

설교를 표절하지 않으면 매우 우수한 목사일 것이다. 그러나 표절없이 설교할 수 있는 목사는 거의 없다. 주석을 조합시키는 것은 표절이 아니겠는가? 여러 목사의 설교를 짜깁기하는 것은 표절이 아닌가?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모두 표절이다. 설교할 때 정확하게 어디에서 인용했다고 표시해야 하겠는가? 부지중에 가져다 붙인 문장도 부지중 표절이다. 자신이 구사한 문장이 자기 문장이라는 확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문장에 자기 생명을 거는 방법 외에 없다. 해아래 새것이 없는 상황에서 표절을 피해나갈 설교자가 누구이겠는가?

설교는 언어행위이다. 문자행위가 아니다. 그런데 문자화된 설교 문장은 도서로 판매되기도 하고, 조건 없이 공개하기도 한다. 우리는 앞에서 일반화된 설교 문장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일반화된 설교 문장에 해당 교회에서 먼저 문제가 발생했어야 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고, 표절한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표절 문장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이해하는 수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일반화된 문장은 복음 문장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복음 문장에는 전달자의 사상과 주체성(성경해석 방법과 내용, 관주에서)이 매우 명료하게 나타난다. 복음 문장은 표절하라고 해도 쉽게 표절할 수 없다.

복음 설교를 표절하려면 매우 어렵다. 그것은 전달자의 영혼이 서려 있기 때문에 그 영혼을 표절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 설교자는 동일한 영혼을 가졌어도, 훈련의 강도와 관점의 폭이 다르다. 자기 수준에서 최선을 다한 설교, 나보다 더 넓은 폭의 설교를 표절하기 어렵고, 나보다 좁은 폭의 설교는 표절할 필요가 없다. 서로 설교 문장을 공유하면서 복음 증진을 꾀하면 된다. 그래서 필자는 설교 문장 공유를 추진하기도 한다. 제발 나의 설교를 표절해 달라고 간청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표절해주지 않는다. 설교문을 인용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혹 표절을 할 것이라면 표절해달라고 원하는 설교문장을 표절하는 것은 좋지 않을까?

설교 표절을 확인하면 성도들은 배신감을 느끼는가 보다. 설교가 복음 문장인지부터 확인해 보라. 복음 문장을 표절했다면 성도들에게 생명의 꼴을 배달해준 배달부인 것이다. 일반문장을 표절했다면 뻥튀기를 배달해준 배달부이다. 배달된 복음은 생명을 유지하고 살릴 수 있지만, 복음 문장이 아니면 아무리 초특급으로 창작해도 어떤 영적 유익도 없다. 죄사함과 영생의 복음을 간절히 사모하는 교회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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