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충진교회 집사, 대구신대 강사 역임

내적치유 세미나가 많이 실시되고 있지만, 내적치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아무리 '성경적'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자기 사랑과 자존감을 키워주는 프로그램이 마치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특효약이라도 되듯이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 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영혼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가지고 자신에 대해 자신감 있는 시각을 갖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자존감에 근거한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는 경우의 위험에 대해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철처히 하나님 중심의 종교이다. 그 속에서 '내'가 강조되면 될수록 하나님은 잊혀지게 되고 기독교는 어느 새 하나님 중심의 종교에서 '나' 중심의 종교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위험의 증거는 오늘날 우리 주변에 수도 없이 널려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사실상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을 단지 '활용'만 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리고 그러한 시도들 역시 얼마나 교묘한가? 내 귀를 즐겁게 하는 '자기 사랑'의 메시지를 멀리 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절실할 때이다. 이를 돕기 위해서 도움되는 책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본다.

옥성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부흥과 개혁사』, p 181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심리학이 신학을 지배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복음이 심리치료 복음으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인생 문제를 정신 의학적 문제로 다루며, 죄를 반목, 불화, 혼동, 자기 비하 등 심리학적으로 취급하고, 이를 현대 정신 건강 치유법으로 해결하려 한다.하나님 앞에서의 죄와 그것으로 인한 비참함 같은 것은 다루지 않는다. 또한 현대 심리학의 언어인 심리치료가 "내적 치유"라는 옷을 입고 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세속의 언어로서의 심리치료는 자기를 높이면서 개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치료가 내적 치유라는 거짓의 옷을 입고 교회 안에서 사용됨으로써 자기성취를 구원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성령께서는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나오도록 죄에 대해 질책하는데(요16:8), 세속의 심리학에 깊이 물든 교회의 상담자는 죄의 질책을 받고 있는 이에게 회개가 아니라 자긍심과 자신을 높이는 생각을 갖도록 하여 양심의 가책을 털어 버리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내적 치유"의 방법론은 결국 죄에 대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기능 장애를 회복하는 것이다. 죄를 기능 장애로 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구원의 개념 역시 자기성취 혹은 기능 장애의 회복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죄의 고백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으며,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에서 죄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유죄의 부담을 짊어지신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김홍만, 『개혁신앙으로 돌아가라, 옛적길』, pp91-92

성경은 하나님 중심적이다. 심리학은 인간 중심적이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이 목적에 부속된다. 인간 중심적인 심리학은 개인의 행복을 최고 목표로 삼고 있다. 절박한 필요를 전면에 내세우는 추세의 바닥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인간의 최대 목표가 자신의 행복이라면, 하나님을 비롯,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은 이 행복을 굳혀 주는 수단이 된다. 심리학은 사람이 외로워서는, 자아상이 낮아서는, 성취한 게 없어서는 행복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의 인간 중심적 추구는 타인과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 중요한' 자아로 초점을 옮겨 놓는다. 이런 세계관은 성경적인 세계관에 정면으로 충돌한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하나님 또는 구원을 제시하는 것은, 좋게 말해도 성경적인 가르침의 왜곡이고 더 정곡을 찌르자면 거짓 복음이다.

게리 길리, 『마케팅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부흥과개혁사, p 71

바울 사도는 헛된 철학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처럼 기도교를 무엇보다 그리스 철학과 혼동하는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이 하나님, 창조, 인간 본성, 역사, 구속을 완전히 변형시킬 만큼 경솔하게 기독교에 간섭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바울 사도가 공격한 대상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 세상의 지혜가 신학을 지배하는 일반적 동향이었다. 이런 동향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주의계 안에서 목격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복음주의계는 가령 대중 심리학에서 자아라는 현세적 관점을 도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 심리학은 영지주의와 유사점이 많다).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 부흥과개혁사, p92


표적과 기사들을 추구하는 운동들, 내적 치유 운동, 영적인 훈련들, 비록 천박하기는 하지만 현대 예배의 인상적인 직접성 등, 이 모든 것은 우리 가운데서 멀어지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을 회복하려는 시도들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머리 좋고 거룩한 엘리트들에 의해 확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마치 신하가 왕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임재하라고 명령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부흥과개혁사, p193

내적치유가 당장 효과가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할지라도, 내적치유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새겨 듣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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