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9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지난 1월에 EBS가 방영한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꼭 한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특별히 그 프로그램의 2부와 3부를 보셔야 되는데 거기에는 이 시대가 만들어놓은 인재상이 정말 바른 인재가 맞는가? 하는 것을 5명의 청년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향한 꿈들을 다루면서 질문합니다. 여기 나오는 청년들의 면면을 보면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생, 중국 최고의 대학인 북경대학교 행정경영학과 재학생, 한양대학교 정보시스템학과 재학생, 그리고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생과 지방대학인 대구 가톨릭 대학을 졸업한 졸업생입니다.

이들은 소위 인재가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거나 혹은 달려가고 있은 젊은이들입니다. 저는 이 방송을 보면서 세상이 말하고 세상이 만들어놓은 인재가 되기 위해 젊은 시절을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인재의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이들은 5명의 전문가들로부터 6개월 동안 맨토링을 받으면서 인재에 대한 일종의 인식전환, 패러다임 쉬프트를 경험합니다. 꼭 한번 보시고 우리의 자녀교육과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멘토링을 통한 인식의 전환과는 비교가 안 되는 혁명적인 삶의 전환을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었던 영이 살아나고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우리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정도의 차이가 있고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근본적인 생각의 변화, 시각의 변화, 소원의 변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죽 했으면 중생한다고 했겠습니까? 예전의 나는 죽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소위 회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겠죠. 회심이란 말 자체가 돌이킨다는 것으로 일종의 방향의 전환, 삶의 패러다임 쉬프트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도의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눈이 밝아져서 그전에 보이지 않던 거룩한 부르심의 소망이 보입니다. 그 거룩한 부르심이 보이면 소원의 변화가 일어나고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고 삶의 목적이 바뀌게 됩니다. 자신만을 사랑하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만 좇아 살던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생기면서 그쪽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죠.

거룩이란 종교적인 어떤 경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분을 위해 나를 구별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시든지 상관없이, 하나님만 있다면,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가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표현이 안 되는 관계로 묶여지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사단은 성도가 이렇게 살지 못하도록 속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예전처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좇아 살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고 유혹하고 도전합니다.

신앙은 이런 방해와 유혹과 도전을 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삶으로 진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은 이 거룩한 부르심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과 사랑은 본질상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상적으로 본다면 사랑이 로맨틱한 고백과 달콤한 재미로 이어질 것 같지만 현실은 상대방을 위한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자기 죽임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 심방을 마치고 집사람과 저 둘 다 피곤해서 소파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지금 고르케를 안 먹으면 병이 날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피곤해서 꼼짝도 하기 싫은데 무슨 고르케입니까? 이전 같으면 당신이 병날 것 같으면 나는 죽을 것 같다고 버티고 있었을 것인데 이제 철이 드는지 가기 싫은 마음을 추슬러서 주섬주섬 옷을 다시 입고는 나가서 고르케를 사왔습니다.

사랑은 로맨틱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기 싫어도 사랑하는   그 사람이 원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고르케를 사러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피곤해서 가기 싫다는 자기를 부인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한 말씀은 금욕과 수행과 어떤 도에 이르는 경지가 아니라 그런 의미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이것을 좋아하신다고 하면 그게 내 본성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내 육체의 본성을 부인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하면서 하나님의 원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매 순간을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좁은 길이고 가기가 꺼려지는 길이고 사단의 방해가 있는 길이지만 이 길을 사랑과 믿음으로 잘 가면 너무나 놀라운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한 상속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거룩이라는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이 약속을 잊지 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부르심의 소망을 볼 뿐 아니라 그 소망대로 살 때 약속하신 성도 안에 있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업은 상속이라는 뜻이며 소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란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된 우리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가 받을 상속으로 너무나 놀랍고 크고 영광스러울 뿐 아니라 풍성한 것입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씀하고 나서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이 약속에 대한 예고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17:1-8절까지를 보십시오. 변화산의 영광, 그 앞에 무엇이 있었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는 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의 본성은 무거워지면서 힘이 빠집니다. 행복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죽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니 얼마나 마음이 무거워집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삶에 대한 약속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이 변형되고 변형된 주님과 더불어 모세와 엘리아가 함께 거닐고 있었습니다. 변화 산에서 제자들이 체험한 영광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나중에 우리가 장차 받을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된다는 그 의미를 어떻게 이 세상의 표현으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모세와 엘리야를 본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주님과 함께 변화되어서 그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말하고 그 영광을 나누는 영광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우리의 기업입니다. 우리가 받을 상속입니다. 사도는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기도합니다. 세상의 기업 정도가 아닙니다. 변화 산의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영생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하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프로에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여학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울대 법대를 입학한 그 순간 너무 좋았대요. 그런데 그 좋은 것이 일주일 밖에 안 가더래요. 그때 그녀가 깨달은 것이 그렇게 또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또 일주일 좋다가 말 것 아닌가? 또 검사가 되고....그렇게 일주일 좋다가 말 인생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약속된 기업은 일주일만 좋다가 말 그런 기업이 아닙니다. 그런 상속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가 점도 있고 흠도 있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풍성한지 얼마나 영원한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풍성이고 영광입니다. 이 세상이 성공이라고 말하고 행복이라고 말하는 그 자리에 가면 일주일 좋습니다. 그리고 더 큰 허무가 찾아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잊고 또 일주일 좋아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위해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자기를 불태웁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후회합니다.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은 사람들을 그렇게 살도록 몰아갑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패배자라고 말하면서 정신없이 이 세상 자체를 그렇게 이끌어갑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기업은 그런 기업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살고 성실히 살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뻐하심과 온전하심이 우리의 방향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요일3:1-3절을 찾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부르심의 소망대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를 알고 그 소망으로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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