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떠난 감사여행 (22)-임승훈 박사

임승훈 목사 - 월간목회편집부장 역임, 한국성결신문 창간작업 및 편집부장역임, 서울신학대학교총동문회 출판팀장, 위대한맘 인천한부모센터 대표, 설교학 신학박사(Th,D), 더감사교회 담임

 소돔과 고모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타락상을 보여준다(창 19장).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의 집은 타락하지 않은 마지막 보루(堡壘)였다. 하지만 풍전등화(風前燈火)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에 놓인 상태다. 언제 함락될지 모를 위기의 처소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들녘은 풍요와 넉넉함의 상징이다. 아브라함에게서 롯이 분리(독립)할 때에 선택의 기준이 있었다. 물이다. ‘물이 넉넉한’(창 13:10)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롯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롯은 실리를 찾아 떠났다. 롯은 자신의 숙부 아브라함이 베푸는 배려(선택의 우선권)를 물리쳐야 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라 하던 작은 아버지의 말을 롯은 물리쳐야 했다. 그것이 그간 베풀어준 감사의 사례였을 게다. 하지만 롯은 감사하지 못했다. 고마워하지도 못했다. 다만 자신이 거느린 ‘양과 소떼 그리고 목동들, 자신과 가족들이 살기에 합당한 목초지가 있는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합리적 실존만을 따져서 선택했다. 롯의 속마음에 감사와 긍정과 고마워하는 마음이 서있을 자리는 이미 존재할 수가 없었다.

감사는 합리성을 넘어서야 한다. 감사는 이성을 넘어서야 한다. 상식도 넘어야 한다. 감사는 삶의 실제를 넘고, 삶의 실존까지도 넘어서야 한다. 적어도 그때 롯은 작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다. 갈대아인의 우르 땅으로부터, 하란 땅 그리고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작은 아버지 없는 롯은 있을 수 없다. 롯은 일평생 작은 아버지 곁에 붙어살았다. 작은 아버지에게 훈풍이 불면 따뜻한 바람을 쪼였고, 북풍한설이 몰아치면 살을 에는 찬바람을 맞아야 했다. 롯은 언제나 작은 아버지 곁에서 곁불을 쬐며 살았다. 간간히 말씀하시는 숙부의 말씀에 고개를 끄떡이며 살았다. 그렇게도 많은 삶의 지혜와 사례들, 하나님의 사람이 나아갈 믿음의 훈련을 보고 살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롯은 감사의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롯은 거기까지 나아가질 못했다. 그것이 롯의 한계였다.

더욱이 롯은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서 큰 전쟁이 났을 때에 포로가 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창 14:11-16). 조카 롯과 그 가족들이 전 재산을 빼앗기고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기른 사병 318명을 이끌고 전쟁터로 내달렸다. 자신의 거처에서 단, 호바에까지 쫓아가 단숨에 살려내 온 적이 있다. 헤브론에서 길보아산 곁을 지나 메론산을 넘고 게데스 끝자락에 단과 호바가 위치한다. 적이 130㎞ 이상 되는 거리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 14:15,16)

예나 지금이나 전쟁포로는 비참한 것이다. 죽음 아니면 노예가 되고 만다. 롯은 이때의 일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때문인가 감사할 수가 없었다. 이제 살만해지니 나더러 삼촌 곁을 떠나란다. 목초지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나의 오늘은 어제와 과거가 공존하여 이룬 역사이다.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이유다. 헌데 롯은 그렇지 못하였다. 양떼, 소떼, 목동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의 수고만 떠올렸다. 자신이 그간 고생한 것이 얼마인데... 감사가 있을 수 없었다.

이제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날이었다.

“탕탕탕! 롯~롯~롯! 야! 이 자식아! 야! 이 놈아!”

삽시간에 롯의 집을 에워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동성애(同性愛) 섹스를 즐기겠다는 것이다. 그 땅에선 이 같은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멀리서 낯선 사람들이 네 집에 들어왔다더라.’ ‘그 이방사람(하나님의 사자, 두 천사)과 우리가 오늘 밤에 즐겨야 하겠다.’ ‘남자끼리 사랑놀이를 하면 그것은 매우 색다른 맛이거든?’ 오늘날의 동성애 퀴어 놀이(☞퀴어(queer)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 성적 소수자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가 성서' 최초로 등장하는 현장이다. 성경에 이 같이 타락한 문화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은 놀랍다. 인간사회의 모든 이야기들이 가감 없이 등장한다. 이것이 성경이다. 여타의 경전이나 윤리학 서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례들이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절). 여기서 ‘그들을 상관(同性愛, homosexuality)하리라.’는 말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남자들이, 남자들끼리 섹스 놀이를 즐기겠다는 뜻이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이성 간의 관계가 아닌 동성 간에, 그것도 낯모르는 사람 간에도 즐기는 퇴폐 성문화가 만연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롯의 만류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잘 마무리 되는 듯 했다. 헌데 그 말이 아주 들어주기 어렵다. 어처구니가 없다. ‘자기 딸을 내어줄 테니 너희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롯도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물들어 버린 결과다. 이 제안을 두고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보살펴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자기희생이라고 말한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자기의 두 딸을, 그것도 시집도 가지 않은, 남자도 알지 못하는 딸들을 낯모르는 불한당들에게 내어 준다? 여기선 딸들의 의견도 필요 없다. 물론 다급했다는 정황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어느 애비가 ‘두 딸을 내어줄테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롯의 처신이 참으로 나약해보인다. 아버지 인간으로서 치욕적이다. 아버지 됨을 상실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자를 지킬 요량이면 자기의 두 딸도 지켜야 하지 않을까?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창 19:8).

하지만 롯의 간청은 일거에 거절당했다. ‘이자가 우리 도시에 들어와 살더니 법관이 되려하는구나. 그들을 해치기 전에 너부터 손 좀 보아야겠다’(창 19:9).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했다. 너무나도 위급함을 알고는 두 천사가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여 ‘문 밖 무리들의 눈을 멀게 했다.’(창 19:11). 앞이 보이지 않는 형국인데도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은 끝까지 롯의 집을 부수고 쳐들어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성서는 ‘문을 찾느라 헤매고 난리가 났다’고 정리한다.

왜 롯은 이렇게 밖에 판단하지 못했을까? 자기의 두 딸이 무슨 자기 물건이라도 된단 말인가. 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애비의 결정이 통할 걸로 생각했다는 말인가. 또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행해도 좋다.’니 이것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수없이 많은 남정네들이 자기의 딸을 농락한다고 치자. 딸은 만신창이가 되어 다음날 새벽 시신으로 대문 앞에 버려질지도 모른다. 만일 살았다 치더라도 그 딸들은 마음에 큰 상처, 즉 남성에 대한 상처, 아버지에 대한 배신의 상처, 엄마에 대한 무능함의 상처 등 수없는 상처로 인해 정상적인 인격체로서 세상을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롯은 그 모든 것을 생각지 못했다. 자신의 위기를 모면해보려고 자신의 딸을 버리려 했다. 이성, 동성, 양성 가리지 않고 삼키려는 남정네들에게 말이다. 이 무슨 해괴(駭怪)한 일인지.... 아무리 급했어도, 아무리 당황했어도, 그런 판단을 하였다는 자체가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다. 왜! 롯은 아버지로서 그렇게 처신할 수밖에 없었을까?

롯은 갈대아인의 우르 땅에서 하란(부친)에게서 출생했다. 롯은 밀가의 동생이며, 이스가의 형제이다. 아버지 하란은 우르 땅에서 할아버지(데라)보다도 먼저 죽었다. 때문에 롯은 작은 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돌보아졌고 자랐다. 아브라함을 따라 하란 땅을 거쳐 가나안까지 나왔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창 12:4).

그는 언제나 아브라함 곁에 붙어 다녔다. 흡사 자신의 아버지인양, 아니 어린 시절엔 아버지라고 생각했었다.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다닌 것은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말씀의 사람,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 약속의 땅에 거류하던 사람(히 11:8,9), 아브라함을 롯은 그림자처럼 붙어살았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그를 불쌍히 여겼고 사랑하였고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숙부와 살 땐 자신이 사랑을 받는 줄을 몰랐다. 자신이 왜 복을 받는 줄도 몰랐다. 숙부의 양과 소와 염소들을 길렀다. 그가 기르는 짐승마다 잘 자랐고, 병들지 않았으며, 새끼도 잘 낳았다. 아니 이제는 목자의 역할이라면 모든 것을 잘 해낼 능력자가 되었다. 목동에 관한한 모든 것을 숙부에게서 터득한 것이다.

가나안에 내려와 삼촌과 살면서 부와 재화도 제법 모았다. 롯이 함께 복을 받은 것이다. 장가들어 두 딸이 태어났고, 딸들에겐 적당한 배필도 생겼다. 헌데 그는 자녀교육에 실패한 듯 보인다. 미루어 짐작 가는 것이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위급한 때에 천사들의 지시를 받고는 롯의 마음이 황망(慌忙)해졌다. 딸들과 예비 사위들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할 때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고 한 점이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킬 때에 롯은 구사일생으로 두 딸과 함께 살아났다. 부인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을 거역하여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사위들도 말을 듣지 않아 함께 멸망당했다. 겨우 자신과 두 딸만이 소알 성에 피신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실은 이들의 피신성공도 성서의 표현은 아브라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The Flight of Lot and His Family from Sodom》 탈출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 루벤스, 1613-15년. 캔버스에 유채. 배스 미술관

하나님이 ...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다’(창 19:29)는 것이다. 롯을 묵상할 때에 아브라함을 연상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자리 곁에 롯은 부평초(浮萍草)처럼 곁불을 쪼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라는 구절에서 숨겨진 글을 묵상해본다. ‘아브라함은 알지도 못하는 길을 ‘감사함으로’ 나아갔다’고 말이다. 하지만 롯은 아브라함의 그런 자세와 정신, 감사의 마음을 읽지 못하였다.

또 히브리서 11:10절을 같은 방식으로 묵상해본다. ‘그가(아브라함)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구절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감사함으로’바랐다. 필자가 임의로 끼워 넣은 모양새이지만 묵상하고 그 구절을 유추해보면 ‘감사함으로’라는 말을 집어넣을 때 어색함이 없으며 그렇게 묵상함이 더 자연스럽다.

이 같이 볼 때, 아브라함은 분명 감사의 승리자였다. 그런데 항상 그 곁에 붙어 다니던 롯은 감사의 실패자란 말이다. 떠오른다. 감사는 감사를 하는 자의 것이요, 감사는 감사하는 자의 몫이다. 감사하는 자만이 누리는 것은 기쁨과 평안이다. 웃음과 희열이다. 그리고 감사하는 자의 종래엔 행복으로 충만해진다. 하지만 감사에 실패하는 자는 그렇지 못하다. 롯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두 딸과 함께 동굴에 거주하다가 자식을 출산했다. 아들이라고 해야 할지 손주라고 해야 할지... 롯은 아무튼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압과 벤암미(암몬)를 낳는 실수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감사의 실패자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나는 어떻게 감사의 승리자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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