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과 민족문화 코드의 출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운동 이래 기독교가 이 민족에게 준 몇 가지 신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 기독교와 민중은 만세운동의 현장을 신앙과 신념을 위한 제단으로 확신했다.  

   ② 그들은 만세운동의 현장을 민족자존(民族自尊)을 선포 실현하는 제단으로 확신했다.

   ③ 비폭력적인 한민족의 주권(主權)회복 요구는 하나님의 정의(正義)임을 확신했다.

   ④ 이를 폭력적인 탄압으로 대한 일제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고 확신했다.

이 신념은 처음엔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독교도들의 신념이었지만, 얼마 안 있어 이런 신념에 익숙해 있던 동학교도들과 전 민족의 신념으로 확산되었다. 그 자연스런 대세를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삼일운동이 그 이후의 역사를 지배하는 특이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바로 이 집단신념(集團信念) 때문이었다. 

삼일운동과 민족문화 코드의 출현

1919년 삼일운동은 한민족과 일제사이의 영적대결이었다. 그렇다면 한민족과 일제 사이에서 벌어진 이 영적 대결에서 승자(勝者)는 누구였을까? 그것은 단연 한민족이었다. 이 한민족 승리의 판결이 타당하다는 것은 이미 이후의 역사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파멸과 한민족의 자주독립의 성취가 그것을 입증한다. 흔히 말하기를, 2차대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한민족에게 해방이 온 것은 미국을 비롯한 승전 연합국 측의 일방적인 은혜로 온 것으로 이제껏 착각(錯覺)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삼일운동의 후속(後續) 결과이다. 삼일운동은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영적 승리이자, 반인류적 범죄에 대한 인류양심의 대승(大勝)이었다.

과연 지난날의 역사를 그렇게 보아도 좋은지 아닌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면, 즉시 판명이 난다. 물론 이 질문들은 모두 삼일운동과 직접 관련있는 역사적 반전(反轉) 상황을 그 사건 순서를 좇아 지적한 것이다. 동시에 이 사태들은 상호간에도 관련성을 지니고, 연속적으로 전개된 사태들이었다. 따라서 이 질문을 바른 자세로 던지면, 자연스럽게 삼일운동이 지니는 의미와 무게를 알게 된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삼일운동이 없었다면, 1차대전 직후에 서구 열강의 기독교 양심이 일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2. 만일 삼일운동이 없었다면, 중국정부가 그토록 갑작스럽게 중일(中日) 안보협조체제를 파기 할 수 있었을까?
  3. 만일 삼일운동이 없었다면, 일제의 도오죠 군사독재의 집권과 중국침략 정책이 그토록 졸속(拙速)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까?
  4. 만일 삼일운동의 불길이 없었다면, 1차대전 직후의 전 세계 식민지 독립운동의 큰 바람이 그렇게 급히 거대하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5. 만일 삼일운동이 없었다면,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회의’에서 서구 열강이 한국 독립을 그렇게 확약(確約)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 이 모든 사태는 삼일운동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사태였다. 그것은 일제는 물론 중국이나 서구 열강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대반전(大反 轉)”이었다. 일제는 본래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노일전쟁(露日戰爭)을 치루면서, 삼일운동 직전까지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밀월(蜜月)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삼일운동의 충격으로 이 관계가 깨졌다. 중국은 1919년의 5.4운동과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대파동이 삼일운동의 거센 바람에 동조적으로 터졌다. 그 바람에 일본의 비인도적인 잔인성에 예민한 경계심이 발동했다. 중국과의 안보협조 체제도 이를 인해 부스러졌다.

일본 국내에선 이에 대한 책임추궁이 군부로부터 일어났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가쓰라와 이또오히로부미 이래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던 일제(日帝)의 동아시아 침략 정책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하여 중국대륙을 정복하자는 야망이었다. 그러므로 삼일운동을 인해 한반도마저 상실할 위기가 닥쳐, 완전히 물거품이 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로 일제의 문민정부(文民政府)는 약화되고, 졸속으로 군부독재와 중국침략정책이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분노를 사는 행위였다. 그들은 ‘가쓰라 – 태프트 조약 당시 ‘한반도는 차지해도 좋으나, 중국은 범하지 말라!’는 단서를 달아, 한민족 식민지화의 원인제공을 하였었다. 그들이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하도록 일제를 도와준 이유가 중국대륙 정복의 야욕 때문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일제는 이 밀약(密約)을 배반한 것이다. 그래서 서구 권력 엘리트들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이든 서구 열강이든, 모두 탈취자의 처지에서 먹이 싸움을 벌린 판이었다. 이러한 서구 권력 엘리트들은 그것을 노골적으로 무어라 할 명분이 없어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뻔 하였다.

때마침 한반도에서 일어난 삼일운동은 서구사회의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일제에 대해 거센 거부자세를 갖게 하였다. 더구나 삼일운동의 영향으로 온 세계의 식민지에선 독립운동의 거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서구 열강의 권력 엘리트들은 일제의 비인도적인 잔혹성을 자신들과 차별화시켜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국가나 식민지에서 정치적 지지율이 치명적으로 급락(急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권력기반 자체를 붕괴시킬 위기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삼일운동을 명분으로 삼아, 서구열강의 권력 엘리트들은 카이로와 포츠담을 비롯한 군사외교 무대에서 일제를 비인도적(非人道的)인 국가로 낙인찍고, 서구 연합국 대열에서 다급히 축출했다. 그리고 한민족을 일제에게서 해방시킨다는 약속을 아니 할 수 없었고, 독립국가 건립 약속을 확약(確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로인해 일제는 자구책(自求策)으로 독일의 나치즘과 추축국(樞軸國) 동맹관계로 들어선 것이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의 대결구도는 이렇게 해서 잡힌 것이다.

일제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짓을 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래도 한민족이 신앙적-도덕적 대결에서 일제를 이기지 못했다 할 수 있는가? 이래도 한민족의 해방이 한민족의 희생양적 피 값으로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이래도 서구 열강의 일방적인 은혜로 한민족 해방이 이루어졌다 하려는가?

이 놀랍고도 중요한 사실이 지난 1938년 이래 역사의 뒤안길에 폐기(廢棄)되어버렸다. 그 해는 일제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기 시작한 해이다. 이 범죄행위는 오늘까지도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범죄행위는 한국 민족을 새로이 일으켜 가고있던 한국개신교에 의해 저질러졌다.

우선 한국 내에서 벌어진 범죄는 잘못된 역사관(歷史觀)이나 고의적인 왜곡해석을 하는 기독교계의 친일(親日)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사계(斯界)의 역사학자들과 문화인들이 그 1차적인 범죄자들이다. 일제에 대해 한민족이 신앙적-도덕적으로 승리한 사실을 그들은 기왕에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을 이용해 유기(遺棄)처분해 왔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남한의 정통성이 모자라거나 없는 통치 집단이 2차적인 범죄 집단으로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나 확장의 필요에 따라 이를 유기시키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역사자체를 왜곡시키기까지 했다.

그런 한편, 한반도 지배 욕구를 못 버린 외세(外勢)는 한민족의 이 영적-도덕적 대승(大勝)의 역사를 사장(死藏)시키려는 학문적 음모조차 진행시켜 왔다. 이들이 그 3차 범죄 집단이다. 그 음모는 한민족의 한반도 통치권(統治權)조차 부인하고자 사료(史料)를 폐기시켜서라도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거짓된 역사를 훼조(毁造)하기 위해 사료를 조작(造作)하기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부터 한국 개신교와 한민족을 일깨움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어야 한다. 한민족 생존이 걸린 통일문제는 ‘대한민국(大韓民國)에 의한 한반도 통치의 타당성’을 새삼 입증해야만 가능하도록 오늘의 국세정세는 미묘하게 뒤틀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일운동의 역사적 실상을 되찾아, 온 세계로 하여금 한반도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이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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