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3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오늘은 시 한편을 소개하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 김남주 시인의 ‘어떤 관료’라는 시입니다.

어떤 관료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흔히 사람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근면과 정직과 성실과 공정과 충성입니다. 그러나 김남주는 혁명의 시인 투쟁의 시인이라는 별명답게 이 시에서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고 충성스러운 어떤 한 관료를 ‘개’로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근면과 정직과 성실은 주인이 악한 주인인지 선한 주인인지 개의치 않고 봉급만 준다면 언제든지 봉급을 주는 그 주인에게 바쳐졌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는 아프리카의 식인종이 이 관료의 주인이 되더라도 이 관료는 식인종에게 충성하면서 계속 관리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조롱하면서 그의 시를 끝냅니다.

김남주의 시에 유물론적 사상과 세계관이 드러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세계를 맹렬히 비판하는 내용들이 아주 투쟁적이고 혁명적으로 펼쳐집니다. 그에게는 일종의 사상적인 편견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료라는 이 시는 사람의 삶에 생각과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겨 줍니다. 생각 없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노예입니다.

인간이 개와 다른 점은 자기만이 아닌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생각할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과 결정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불이익과 아픔을 준다면 그 선택과 결정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급을 주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에 개의치 않고 봉급을 주는 사람의 명령을 수행하는 관리라면, 그가 근면할수록 그가 성실할수록 그가 충성스러울수록 이 사회가 힘들어진다는 것이죠. 그런 관료라면 개밥을 주기만 하면 충성하는 생각 없는 개와 다를 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도 생각이 중요합니다. 너무 이성적인 생각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으로 제단해도 곤란하지만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미신적인 신앙과 맹목적인 신앙도 못지않게 곤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도 생각이 중요합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필요만 나열하거나 자신의 소원만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내 기도를 결제하시고 허락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가 왜 나를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이 귀한 기도의 특권을 허락하셨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허락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결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며 영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영광의 아버지에게 하는 우리의 기도가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욕심만 나열하고 현실적인 필요만 간구하는 것이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도의 기도는 우리 말 번역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기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눈을 밝혀서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과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이 어떠함을 알기를 원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원문 상으로 보면 17절 후반부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가 ‘엔 에피그노세이 아우투’로 ‘그의 지식 안에서, 혹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로 번역해야 하는 전치사 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의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사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시어 그의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과 믿는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그의 능력의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기를 원한다는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 하나의 기도를 이끌어가는 핵심이 성령께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혀서 마땅히 볼 것을 보고 알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하고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해달라는 것은 생각과 깨달음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전에 깨닫지 못했던 진리가 깨달아 집니다.

지금 에베소 교회의 성도는 성령의 은혜로 이미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진리의 말씀을 구원의 복음으로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고 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들에 대해 배우고 보고 깨닫고 알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하면서 더 많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고 성도 안에서 허락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믿는 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능력과 앞으로도 베풀어질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믿으면 신앙이 미신이 됩니다. 이런 생각 없이 기도하고 믿으면 맹신이 되어서 세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어떤 관료 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힐링 캠프에 나와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 적이 있습니다. 그의 책과 그의 강연을 들어보면 생각 없는 힐링과 생각 없는 위로와 생각 없이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미친 질주가 난무한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생각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과 공감이 있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무조건 빠르게 가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말을 합니다.

이게 목사의 말이 아니라 철학자의 말입니다. 철학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 작은 반향을 일으키는데 반해 거대한 한국교회는 이 사회에 반향이 아니라 반감만 키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성도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하고 충성하고 헌신해왔습니까? 그런데 왜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반감만 살까요? 왜 우리는 충성하고 헌신한다고 하는데 주위의 사람들은 그런 교회와 성도들 때문에 아파하고 상하고 고통 받는 일들이 일어날까요?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더라도 철학자의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불렀고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 하다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면 어떻게 그분을 뵈올까? 도대체 하나님이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기도하는 우리에게 베풀고 계신 힘과 능력은 무엇일까를 생각을 안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진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어려운 말 하지 말고 힘들게 사는 나를 더 많이 위로해달라고 그러고 교회는 그런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해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은 사람을 모으고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하고 더 큰 예배당을 짓는 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함과 생각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세상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도의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십시오.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되고 보게 되고 그것을 위해 우리의 남은 생애를 살아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이것이 안보입니다.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그것을 위해 베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그것에 관한 생각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어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우리의 마음을 살려내셔서 이것들을 보게 하고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생각하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단히 그렇게 기도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 내용대로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금방 또 어두워지고 둔해집니다. 눅21:3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덧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왜 우리가 매 순간 성령의 은혜를 구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가만히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둔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 하지 않고 살면 성도인데 마음이 둔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둔해지면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보여야 할 것이 안 보입니다. 깨달아져야 할 것이 안 깨달아지고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의 부르심의 소망대로 내 삶은 진행되고 있는가? 내 마음의 눈은 그런 것들을 보고 생각하는 밝은 눈이 되어 있는가? 그것을 위한 내 기도제목은 있는가? 이 생각을 갖고 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오늘 제가 칼럼에 쓴 것처럼 산다고 사는데 그 live가 뒤집어진 evil이 될 수 있고 그러한 모든 삶의 흔적들인 lived는 그 배후에 devil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마귀의 종이 되는 삶의 흔적이 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의 눈이 늘 밝아져서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알아야 할 것을 알아 그것을 생각하면서 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사는 생애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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