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는 ‘동일’과 ‘유사’로 정통과 이단이 나뉘었다. 'homoousion'‘i’가 들어가면 이단이 되는 형국이었다. ‘유사(similar)’은 두 실체가 되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했다. ‘오직 믿음’과 ‘행함있는 믿음’은 동의어가 아니다. 오직 믿음은 오직 믿음이고, 행함있는 믿음은 행함있는 믿음이다.

최근에 믿음과 행함 관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오직 믿음에 대한 불완전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며, ‘행함있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과격하게 ‘오직 믿음’이 구원파적 믿음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더 과격하게 한국 교회는 예수를 죽인 1세기 유대교의 과오를 반복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필자는 먼저 한국 교회에 자기가 속한 자인지 교회 밖의 사람인지를 묻는다. 자기가 속한 집단을 구원파의 구원론, 예수를 죽인 유대주의라고 평가한다면 자신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일까? 필자는 한국 교회에 구원파의 구원 개념이 없다고 제시했다(현대 칭의론 논쟁, CLC). 그런데 끊임없이 구원파적 구원관에 대해서 제기하는 것은 ‘방종과 부패’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원파는 방종주의이고, 한국교회는 교리에 미숙한 부패한 상태이다. 방종과 부패는 교리와 관계에서 전혀 다른 자세이다. 방종은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부패는 교리를 이행하지 않은 상태이다. 한국 교회는 전혀 구원파 구원관과 다르고 같을 수도 없다. 그런데 구원파 구원관이라고 평가하는 주체가 한국 교회를 주도하는 지도자인데,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인가?

‘오직 믿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윤리가 없다는 연결은 상황 분석이 바르지 못한 것이다. ‘오직 믿음’은 구호가 아니고, 교리이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오직 믿음’에 대한 의심과 부정은 단순히 캠페인에 대한 회의가 아니고 교리에 대한 회의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부류에서 ‘부적절한 윤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부적절한 윤리’를 행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오직 믿음’이 ‘오직 믿음’일까? 그것을 ‘오직 믿음’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거짓말쟁이가 하는 거짓말을 진리로 믿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 가짜 진리 위에 다른 체계를 구축한다면 결국 거짓 위에 세운 구조에 불과하다(마 7장).

독일에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사는 모습을 송다니엘 목사가 마이어의 마태복음 주석을 통해서 한국 교회에 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마태복음 주석, 진리의 깃발사, 2017). 좋은 사례가 없으면 좋은 사례를 만들어야 하고, 좋은 사례가 있으면 그 사례를 기본으로 더 좋은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믿음을 주장하고 행함이 없는 좋지 않는 사례를 근거로 한 사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부당하다. 좋은 사례를 더욱 좋은 사례로 개발해야 하는 것이 바른 태도일 것이다. 오직 믿음을 주장하면서 바른 행실이 있는 사례가 한국 교회에는 하나도 없을까?

‘오직 믿음’은 루터가 16세기 교회에서 부당한 가르침을 개혁하기 위해서 외친 구호이다. 교회를 개혁시키지 못하고 분리되었다. 분리된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오직 믿음은 개신교회의 근간이다. 오직 믿음으로 개신교회가 부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오직 믿음을 외치며 행함이 없으면 오직 믿음이 유효하지 않다고 누구나 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부당한 것이지, ‘오직 믿음’ 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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