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어느 부부가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비는 우물가에 갔습니다. 부인이 먼저 몸을 굽혀 소원을 빌고 동전을 던졌습니다. 뒤이어 남편도 몸을 굽혀 소원을 비는데 너무 굽혀서 우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와, 정말 이루어지는 구나”

사람들 마다 제 각기 소원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무병장수의 소원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부귀영화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엡2:1-3절에 의하면 어떤 소원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이 아닌 것은 자신의 소원과 세상의 소원으로 육체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며 그런 소원의 뒤에는 공중권세를 잡고 이 세상 풍조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사단의 미혹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소원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어서 육체의 욕심에 속한 소원과 세상의 소원으로만 살아가던 사람을 전혀 다른 소원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소원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는데 소원이 변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이상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마음의 눈을 밝혀서 계속 이 부르심의 소망을 확인하고 그 소망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주셨던 소망, 곧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가 엡1:4-6절에서 확인한 내용으로 거룩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성도는 거룩함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문제는 거룩함과 영광의 개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룩하게 산다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는 것을 너무 추상적이고 종교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종교적으로만 이해하면 관념적이 되거나 바리새적이 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거룩함을 그런 차원에서 설명하지 않고 전혀 다른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엡1:4절을 다시 보십시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시고 불러내어 하나님의 아들 삼았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거룩함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구별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입니다. 사랑을 위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위해 자신을 구별시키는 것이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엡5:25-28절까지를 보십시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말씀하는데 25절과 28절에는 남편의 아내사랑을 말하면서 중간에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하면서 거룩을 언급합니다. 26-27절이 그 내용이죠. 무슨 말입니까? 거룩함이 종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너무나 실제적인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기인해서 우리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하나님 사랑에 어긋나는 모든 것과 자신을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실 때 의도하셨던 인생의 참된 목적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서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존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그 사랑에 방해가 되고 흠이 되고 점이 되는 것들을 피해 자신을 구별시켜 드리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 아래 떨어져 자신만 사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소원으로 삼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을 불러 다시 하나님이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대로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고 소원을 주십니다. 빌2:13-12절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해서 매일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이 부르심의 소망을 보고 이 소망으로 살아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힘의 위력과 능력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믿음을 주시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개혁파교회는 전통적으로 소요리문답 1문을 통해 이것을 성도가 사는 인생의 목적으로 가르쳐왔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영광 역시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개념입니다.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잠시 만이 아니라 영원토록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즐거워하며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다른 말로 그것이 거룩입니다.

예/아내가 언제 가장 영광스럽습니까? 남편이 자신을 다른 어떤 여자들보다 더 사랑하고 인정하고 즐거워할 때입니다. 그것이 아내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남편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도 그러합니다. 손을 들고 높이 찬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살지 않고 자신만 사랑하는 육체의 소원을 따라 살도록 유혹합니다. 우리의 마음눈을 둔하게 하고 어둡게 해서 부르심의 소망을 보지 못하게 하고 부르심의 소망대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깨어서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부르심의 소망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