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장로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 동 신학대학원 졸업

중세인들은 여성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였다. 중세 교회는 결혼을 나쁘고 성가신 제도라고 하여 성직자들에게 독신을 강요하였다. 16세기 들어서면서 여성은 예전보다 덜 예속된 상황에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여성과 결혼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였다. 결혼은 오직 자녀를 낳기 위한 수단이었고, 성적 즐거움은 부부라 할지라도 죄라고 가르쳤다. 성관계를 한 남녀는 다음 날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으며 생리 중인 여성은 교회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칼빈은 생각이 달랐다. 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생식을 제외하고도 절도 있게만 행한다면, 즐길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결혼을 하나님의 약속이며 상호 서약으로서, 하나님의 주재와 요구로 이루어진 결합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며 학대하지 말고 성적 상대로만 보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칼빈은 말라기 주석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서로 결혼한다면 그것은 아내가 배우자 혹은 동반자 혹은 동료로 남자의 반쪽이 되는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고 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하여 자기를 희생하고 사랑하셨듯이 동료인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칼빈의 아내 이들레트

그러면, 칼빈은 아내를 사랑하였을까? 이들레트는 칼빈과 결혼할 때 아이가 둘 있는 과부였다. 그녀는 가난하였고 허약하였으며 재세례파 출신이었다. 칼빈 역시 가난하였다. 그가 목회를 시작하고 첫 다섯 달 동안은 전혀 사례를 받지 못했다. 친구들이나 학생들이 돈을 모아 줄 정도로 가난하였다. 후일 사례비를 받긴 하였지만, 빵을 살 돈도 되지 않았다.

가난한 칼빈 집에는 칼빈의 동생 앙뜨안느와 당대 개혁자들이 그러하듯 기숙 학생들과 함께 살았으며, 그들을 돌봐주는 귀족 부인 베르제(Verger)가 있었다. 이들레트는 새로운 안주인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경제적인 문제만 아니라, 베르제 부인은 지나치게 민감하고 말을 함부로 하며 주변 사람과 충돌하기 일쑤였다. 결국, 칼빈의 동생 앙뜨안느와 심하게 말다툼을 한 후 자기 아이들을 그곳에 버려두고 도망쳤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1540년 8월 결혼한 후 첫 45주 동안 무려 32주나 집을 비웠다. 1541년 1월과 4월, 찰스 대제가 소집한 제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칼빈은 석 달이나 집을 떠나야 했다. 석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황제가 소집한 회의에 참석차 레겐스부르그(Regensburg)로 떠났다. 회담이 진행되는 중 불행한 소식이 들려왔다. 아내와 가족이 사는 스트라스부르그에 흑사병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 걱정으로 회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파렐에게 편지하였다.

“지금 내 집은 매우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동생은 찰스와 함께 이웃 마을로 피신하였고, 아내는 내 동생의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 밤낮으로 내 머릿속에는 아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보(Vaud) 지방의 종교개혁자 삐에르 비레(Pierre Viret)에게도 아내를 걱정하는 편지를 썼다.

“나의 고통을 더욱 가증시키는 것은 그들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고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 아니 최소한 내가 함께하여 그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오.”

1541년 6월 말 스트라스부르그에 돌아온 칼빈은 건강하게 살아남은 아내와 재회의 기쁨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1541년 9월 제네바는 칼빈을 다시 초청하였다. 그는 가고 싶지 않았다.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맞는 것이 제네바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

이들레트 역시 제네바로 가고 싶지 않았다. 스트라스부르그는 그녀에게 고향 같았다. 그곳에는 오빠의 가족이 살고 있어서 그녀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다. 제네바는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다. 제네바에는 친구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일부 시민은 자기 집 개를 ‘칼빈’이라고 불렀다.

우여곡절 끝에 제네바로 간 칼빈 부부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제네바에서 첫 여름을 보내는 동안 이들레트는 임신하였다. 그녀는 임신 중에 교회 관리자 아미 포랄(Amédée porral)의 임종 시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방문하였다. 칼빈은 그런 이들레트를 보면서 참된 동역자로 생각하였지만, 속으로는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였다. 그는 비레(Viret)에게 편지하였다.

“그녀(이들레트)는 그에게 선한 용기를 갖도록 권했고 또 그녀가 우연히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에 이끌려 복음에 봉사하기 위하여 갔음을 말했다오.”

죽어가는 그를 위로한 지 몇 주 후 이들레트는 조산아를 낳았다. 칼빈은 리틀 쟈끄(Little Jacques)라 이름 하였지만 두 주일 만에 아기는 죽었다. 그것은 칼빈에게 큰 아픔이었다. 그는 자기 심정을 동료 개혁자 비레에게 표현하였다.

“주님은 어린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쓰라린 고통을 우리에게 주셨어. 하지만 그분은 아버지이시기에 자기 자녀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시는 분이시네.”

3년 후 딸이 태어났지만 곧 죽었고, 그로부터 2년 후 이들레트는 39살 나이에 세 번째 아이를 낳았지만 역시 죽었다. 이들레트의 신체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칼빈의 개혁을 반대하던 프랑스와 보도앙(François Baudouin, 1520~1573)은 칼빈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고 하였다. 칼빈의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은 끊임없이 칼빈을 괴롭혔다.

그들은 이들레트를 비방하였다. 재세례파는 로마 가톨릭이나 시 정부의 공식화된 결혼을 부인하고, 당사자 간의 결혼(Friedelehe)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재세례파 결혼은 합법성이 없다고 가톨릭은 비판하였다. 이들레트의 첫 결혼이 재세례파식 결혼이었으므로 그 결혼은 원천 무효이고, 첫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사생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이들레트를 창녀라고 불렀다. 칼빈과 이들레트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은 이들레트의 더러운 과거 때문이라고 욕하였다. 조용한 성품의 이들레트는 이 모든 중상모략을 묵묵히 참아냈다. 그러나 이들레트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몸도 허약한 이들레트는 더 버텨내기 어려웠다. 40살이 되던 1549년 그녀는 병석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칼빈의 사역이 방해를 받을까 염려하였다. 칼빈은 병상을 떠나지 않고 그녀를 간호하였다. 혹여 남겨놓은 아이들 양육 문제로 걱정할까 봐 칼빈은 말하였다.

“아이들은 내가 책임지고 보살필 터이니 걱정 마시오.”
그러자 이들레트는 대답했다.

“저는 그 아이들을 이미 하나님께 맡긴 걸요.”

1549년 3월 29일 이들레트는 하나님 품에 안겼다. 칼빈은 부인이 떠나던 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소리 질렀다. ‘오, 영화로운 부활이여! 오 아브라함과 우리 선조의 하나님, 온 시대의 신자들이 당신을 신뢰하였고, 아무도 헛되이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저의 소망을 오직 당신께 두나이다!”

한 시간 후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칼빈은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그리스도의 은혜, 영생의 소망, 행복했던 결혼, 그녀의 새로운 영생의 출발에 관해 몇 마디 말을 하고 기도해주었다. 그녀는 칼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9년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 동안 아프고 힘들고 상처받았던 순간이 많았지만, 칼빈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였고 행복하였다.

1549년 4월 2일 칼빈은 파렐에게 아내의 죽음에 대해 편지하였다.

“제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지금쯤 당신에게 도달했겠지요. 나는 슬픔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제 친구들도 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1549년 4월 7일 동료 개혁자 비레에게 편지하였다.

“자네는 내가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유약한 마음을 가졌는지 알고 있을 것이네. 내가 만약 나 자신을 강하게 통제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래도록 슬픔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네. 나는 무척 슬프다네. 내 생에 최고의 동반자가 내게서 떠나갔으니… 내가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그녀는 배척과 가난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음까지도 나와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

칼빈이 이들레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증거가 하나 있다. 칼빈은 이들레트가 죽은 다음 해 데살로니가후서 주석을 써서 베네딕트 텍스터(Benedict Textor)에게 헌정하였다. 그는 아내를 죽기까지 성심껏 돌본 의사였다.

프랑크푸르트 프랑스 교회 사역자인 리차드 보발(Richard Vauville)이 홀아비가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편지하였다.

“훌륭한 아내의 죽음이 그대를 얼마나 잔인한 상처와 고통을 주었는지 나는 나 자신의 체험으로 알고 있소. 사실 난 7년 전 그와 같은 슬픔에서 이겨나는 것이 얼마나 내게 어려웠던가를 상기하고 있소.”
 
칼빈은 불과 40세였지만, 아내를 생각하며 일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이들레트가 남겨 놓은 아이들을 성심껏 돌보았다. 15년 후 1564년 5월 27일 칼빈은 아내 이들레트 곁으로 갔다.

참고도서


1. R. 스토페르, 인간 칼빈, 박건택 옮김 (서울 : 정음출판사, 1983)
2. 존 칼빈, ‘구약성경 주석 29. 하박국,스바냐,말라기’ 존 칼빈 성경주석출판위원회 편역, (서울 : 성서교재간행사, 1982)
3. 필립 샤프, 스위스 종교개혁, 박경수 옮김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
4. 김동주, "칼빈의 결혼과 가정에 관한 소고" , ⌜역사신학 논총⌟ 제6집,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03)
5. 윌리암 피터슨, "존 칼빈의 아내, 이들레뜨", ⌜그말씀⌟ 1997년 10월호, 두란노 (1997)
칼빈의 여성관
6. 강정진, "깔뱅의 삶과 죽음", ⌜칼빈논단⌟ 칼빈대학교 (2001)
7. 김충현, "깔뱅의 여성관", 충남대학교 석사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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