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6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지난 12월에 시작한 에베소서 강해가 오늘 1장을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근 4 달 정도 에베소서 1장을 묵상해오면서 들었던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격이고 하나는 슬픔입니다. 감격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입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큰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과 못남 때문이고 또 이런 우리들 때문에 가슴앓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 때문입니다.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오늘 에베소서 1장의 마지막 부분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교회를 어떤 능력으로 세웠고 어떤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시는지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과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케 하신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 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지난 주에 조금 보았지만 1: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것은 교회에 대한 가장 놀라운 설명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입니다.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며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골1:19절에 의하면 예수님에게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아버지로부터 주어져 있습니다. 그 충만은 소진되거나 소모되거나 없어지는 충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 것도 없어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충만의 근원이며 충만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에게 교회가 그의 ‘충만’이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충만 그 자체인 예수님이 교회가 없으면 충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만족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러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아니 이 우주의 모든 것을 가진다 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없으면 이 세상의 전부,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내게 있다 해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란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온 교회가 되고 성도란 이름으로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찬양해도 그의 택한 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 사랑에 화답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충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높은 우주의 보좌에서 교회를 향하여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온 우주가 나를 향하여 예배하고 경배해도 내가 나의 피를 흘려 산 나의 교회, 저 성도들이 나의 이 마음을 알고, 나의 사랑 앞에서 더 거룩해지고 더 온전해지고 더 흠이 없어지고 더 성숙해지는 나의 신부로 등장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너무나도 갈망한 나머지 교회가 더 주를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그리스도와 사랑을 나누고 함께 춤을 추면서 마음을 주고받는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그리스도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온 우주의 왕자인 그리스도가 절대로 충만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고 기뻐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장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몸이 머리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입니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교회가 ‘충만’인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 구석구석에 그리스도가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교회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견딜 수 없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 것도 없어도 그리스도만 있으면 기뻐해야 하고 만족해야 하고 충만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참된 교회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는데도 끊임없이 다른 것을 요구하고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엄청난 사랑의 초대 앞에 늘 흠이 많고 부끄럽고 책망할 것이 많은 우리입니다.

놀라운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런 우리들을 질투하기 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에게 가르쳐주신 마음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끝없이 다른 남자를 향해 가는 고멜을 아내로 주셔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직접 고통으로 느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고통이며 아픔이며 질투입니다. 끝없이 배신하는 고멜이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서 아파하면서 질투하면서 기다리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마침내 그를 돌이켜 놓는 마음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지요? 얼마나 황송한지요?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요? 음탕한 고멜과 같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고 우리와 사랑의 관계로 깊어지기를 원하시다뇨? 도대체 어디를 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자격이나 조건이 있단 말입니까?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알아 우리도 하나님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는 열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픔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거절당할 때의 아픔입니다. 저는 딱 두 번 비슷한 아픔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아내를 만나기 전 제가 잠시 호감을 가졌던 자매 때문이고 한번은 제 아내 때문입니다. 아내를 만나기 전 잠시 호감을 가졌던 자매는 대학 3학년 복학하기 전에 저와 같이 혼성듀엣으로 노래하고 다녔던 자매인데 교회는 다니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는 제가 많이 좋아하고 사랑의 감정에 빠지고 그런 정도는 아니고 거저 ‘괜찮네’ 정도의 마음을 가졌던 자매인데 문제는 이 여자가 제가 소개해준 제 친구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격렬한 사랑에 빠지지 않았는데도 늘 저와 같이 노래하고 다니던 친구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괜히 마음이 씁쓸하고 기분이 좋지 않더라구요. 제 친구는 저보다 키도 작고 생긴 것도 저보다 잘 생긴 것도 아닌데 매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친구가 락 그룹사운드의 리더로 퍼스트 기타를 쳤는데 학교 가을 축제 때 그 친구의 공연에 제가 게스트로 초청을 받고 이 여자와 같이 노래 부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자매가 그 친구의 화려한 락 기타 연주 솜씨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그 친구를 따라다니면서 좋아하더군요. 나중에 들어보니 결국 결혼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여자가 긴 생머리를 휘날리고 다녔는데 저는 그때부터 긴 머리 여자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집사람을 만나서 가장 먼저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머리 잘라’입니다. 

그러나 이 자매가 준 아픔은 제 아내가 제게 준 아픔에 비하면 조족지혈입니다. 제 아내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언제 아픔을 준 적이 있었단 말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아리한 일이 있습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못들은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현실이 아니라 꿈에서의 일입니다. 꿈에 아내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저를 눈앞에 두고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그 남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꿈이어야 해 생각했습니다. 꿈인데도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정말 저미고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알람 소리에 깨었는데 깨고 나서도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먹먹한지 그날 새벽기도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생생합니다. 꿈에도 그런데 정말 현실에서 그런다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긴 머리 자매가 준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분의 ‘충만’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시고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더 좋아하고 더 따라가고 더 원하면 속에서 질투의 불길이 타오르고 마음이 미어지면서 너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나의 ‘충만’인데 왜 내 마음을 모르고 그러고 있니? 라고 하시면서 견디지 못해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우리를 억지로 돌려놓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외의 다른 것을 향하여 가는 우리를 기다리고 또 사랑으로 설득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그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으로 불이 타십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는 시를 다 아실 것입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참 기가 막힌 시입니다. 지독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배신을 당합니다. 나는 지독하게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 없으면 못살겠는데 그 사람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신답니다. 내가 싫다고 떠난 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보내줍니다. 사랑은 논리가 아니고 정서니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의 마음이 그러하니 보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잡지 않습니다. 갈테면 가라고 합니다. 말없이 고이 보내줍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고이 보내는 것이지 절대로 고이 보내는 게 아닙니다. 죽을 것같이 아픕니다. 그래서 ‘잠깐만’하고 그 사람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 사람이 가는 길에 진달래 꽃잎을 뿌립니다. 그리고는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지금 당신을 고이 보내는데 이게 그냥 보내는 게 아니다. 내가 죽을 것 같이 아프다. 당신이 지금 이대로 간다면 그것은 이 진달래처럼 나를 밟고 가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당신이 떠나는 그 발걸음 밑에 나는 짓이겨진다. 내 마음은 고통과 아픔으로 짓이겨지고 부서지고 뭉개진다. 그런데도 가겠느냐? 나를 짓이기고 가겠느냐?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이 더 좋다고 그것을 향해 갈 때 억지로 막으시거나 강제로 막으시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강제가 아니라 마음이고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마음은 진달래꽃을 뿌려주는 그 마음입니다. 진달래꽃의 심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떠나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에베소서 1장을 마무리하면서 교회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리고 바른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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