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1. 【빌 2:1-4, 빌립보 교회에 주는 바울의 권면: 사랑과 겸손으로 한마음을 품으라】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 권면을 한다. 1절에 헬라어(Εἴ τις οὖν) “그러므로”는 조건접속사로 분명한 선택을 요구할 때 사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과 “사랑의 위로” 그리고 “성령의 교제와 긍휼, 자비”가 있다면(조건이지만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한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했다(1-2절).

그러나 맞지 않는 조건이 있으면 당연히 한마음을 품을 수 없다. 빌립보 교회에 한마음을 품지 못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믿음의 퇴보이고, 믿음의 퇴보로 말미암아 발생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교회는 한 믿음이기 때문에 한 마음을 이루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빌립보 교회에 두 마음이 발생한 것이 문제였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고 한 마음을 품는 것이다(2절).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의 원인은 다툼(경쟁)과 허영이었다(3절).

그래서 바울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다툼과 허영을 금하고,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일을 돌보라고 명령했다(3절). 그리고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일을 돌보며, 이웃에 대해서는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도록 가르쳤다(4절). 문제 있는 교회이지만,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의 권면으로 바르게 되는 것은 주의 말씀에 경청하고 순종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2. [빌 2:5-11,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 비하(Kenosis)]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한마음을 요구하고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이다(5절). 교회가 한 믿음을 품었다면, 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다양한 모습 속에서 한 목적(죄사함과 영생)으로 가는 방향성은 일치할 것이다. 믿음과 현상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믿음에 부합되도록 지도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실체(實體, very nature God, being in the form of God, 히 1:3)시지만 사람의 실체(實體)를 취하여 사람의 실체가 되셨다(6~7절). 거기에서 자기를 더 낮추시어 죽기까지 복종(服從, 5255)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8절). ‘이러므로(διὸ καὶ)’라는 접속사는 매우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9절, 참고 롬 1:2-4). 마치 전자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후자가 실행된 것으로 이해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문법적 해석의 한계를 인지할 수 없고, 바른 성경 해석에 해석자의 신학 체계가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과 땅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9-11절). 자기비하에 근거해서 진행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돌려질 영광이다. 그럼에도 성육신으로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여, 택함받은 자들이 스스로 꿇어 경배하도록 하신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의 경륜을 인지하는 시간적 순서대로 기록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믿음에서 성도가 되었고, 그 믿음에서 성도는 행동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卑下, 비움)은 다양한 신학 이해를 창출했다. 성육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바르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은 비유나 비교 대상이 아니라 일회 계시로 유일하고 독특하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1:15-17절이 고대교리의 핵심문장이었다면, 빌립보서 2:5-1절은 종교개혁과 근대 교회에서 추구한 신학의 핵심문장이다. 예수의 비하를 거부하지는 못하고, 윤리교사의 경비, 인류애 실현(자기죽음, 신성으로 인도하는 길 등)을 위한 승화로 해석한 것이 자유주의이고 현대신학이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을 고백한다. 교회를 이루시기 위해 주 하나님의 오심과 피흘리심을 믿어야 한다(행 20:28).

3. [빌 2:12-18,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참고) 빌립보서 2장에서 ‘그러므로’가 있는데, 헬라어에서는 모두 다른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οὖν, διὸ καὶ(이러므로, 9절), Ὥστε).

바울은 권면을 시작할 때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표현한다. 요한 사도는 “자녀들아” 혹은 “사랑하는 자들”로 표현한다(참고 요한서신). 사도들은 목자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호칭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자기양을 사도에게 위탁하셨다. 사도들은 주님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위탁된 백성(교회)을 사랑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양을 사랑하지 않음을 분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있건 없건 동일한 행동이어야 함을 주장했다(12절). 그러나 정작 사도가 없는 때에 더욱 더 믿음에 경성(警省)해야 함을 주문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항상 복종(5219)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것”을 권면했다(12절).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마치 자력구원으로 이해하기 쉽다. 이루어진 구원을 변함없이 계속 진행하라는 의미이다(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NIV).

바울 사도는 마치 자기 열심으로 구원을 진행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했다(13절). 분쟁과 소동은 자기의, 자기열심이 나타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을 원망이나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서 행하라고 권면했다(14절).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질서를 어그러뜨리고 거역하는 세대에서 빛의 자녀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15절). 믿음의 백성들은 세상의 빛이다. 별이 어둠 속에서 빛이 나는 것처럼, 믿음의 백성들이 어둠의 세상 가운데서 빛을 발한다(15절). 그 빛은 생명의 말씀이다(16절). 밤하늘의 별이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 자녀의 빛은 영생을 지시한다. 그 영생은 생명의 말씀에 있다. 교회에 분쟁이 나타나 그 빛이 어둠에 함몰되어가고 있었다.

생명의 말씀(복음)을 밝히는 것이 사도의 역할이고, 사도는 복음으로 힘써 교회를 이루었다. 모든 교회 설립은 기적인데, 빌립보 교회는 더 특이한 기적이다. 그런 빌립보 교회가 두 마음으로 교회가 나뉘면 바울의 달음질(사역의 수고)가 헛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사람(목사)로 말미암아 인격적으로 진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 문제에 혼신을 다해서 권면한다. 사도의 몰락은 교회의 몰락이고, 복음의 퇴보이다.

빌립보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해낸다면, 사도가 주님 앞에 설 때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16절). 사도의 자랑은 성도의 복이다. 교회가 빛을 비추어 세상에서 영생의 길을 보여주어 구원을 진행한다면, 그리스도의 날(재림)에서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을 전제(관제)로 드림이 되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한다(17-18절).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그래서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고 한다. 자신을 전제로 드려서라도 교회를 온전케하며, 복음을 전하면서도 기뻐하는 사도 바울을 누가 본 받아 행동할 수 있을까? 성 베드로 성당 보좌에 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겸손한 아버지(Pope)와 사도 바울을 견줄 수 있을까? 경건한 추기경들의 콘클라베(Conclave)를 걸쳐서 세워진 경건한 아버지를 따를 것인가? 주 예수 앞에 전제로 자신을 기쁘게 드리는 사도 바울을 따를 것인가?

4. [빌 2:19-30,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디모데를 언급한다(19절). 사도의 편지는 개인자격으로 쓴 편지가 아니다. 공적 직분자로 쓴 편지이기 때문에, 동역자의 이름이 항상 동반한다. 그리고 사역도 항상 동역을 했다.

사도는 디모데를 빌립보로 속히 보내려고 하는데, 빌립보 교회 사정을 자신에게 잘 전해줄 수 있는 적임자이기 때문이다(19-23절). 사도 바울은 사역 단체를 이루어 동역했다. 바울은 그 중에 디모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평가했다(21절).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몇몇은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디모데는 2차 전도 여행부터 항상 바울 곁에서 혹은 파송을 받아 변하지 않고 신실하게 사역했다. 디모데는 사도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옥에 갇힐 때 자식이 부모에게 하듯 정성으로 함께 했다(22절). 디모데의 연단이 있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추측한다면 연약하고 순수한 디모데가 거친 사역과 변화와 다양한 성격의 교회 사역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직접 빌립보에 가고 싶은 마음을 피력했다(23절). 바울이 직접 갈 수 없기 때문에 디모데를 보려고 했지만 에바브라디도(Epaphroditus)를 보냈다(24절).

바울 사도는 디모데와 함께 에바브로디도라는 빌립보에서 자신에게 보낸 사자에 대해서 말한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에바브로디도 편에 재정 후원과 사도의 필요들을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을 보냈다(25절). 바울은 에바브라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라고 했다(25절).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에 보려고 했다. 그것은 에바브라디도가 심한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바브라디도는 그 사태를 빌립보에 알리지 않았다. 교회에 큰 근심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26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바브라디도를 긍휼이 여겼고, 바울을 긍휼이 여겼고, 빌립보 교회를 긍휼히 여겨 에바브라디도를 회복시켰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려는 계획을 취소하고 에바브라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다시 보내는 것이라고 상황을 보고했다. 바울은 급히 서둘러서 에바브라디도를 빌립보에 보냈다. 빌립보서는 에바브라디도의 편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28절). 에바브라디도를 본 빌립보 교회의 기쁨을 상상하며 이미 기쁨에서 편지를 쓰며 기쁨의 모습을 그리며 에바브라디도를 빌립보에 보냈다. 빌

립보 교회가 에바브라디도를 기쁘게 영접할 것을 알면서도, 바울은 교회에 에바브라디도를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권면한다(29절). 에바브라디도가 빌립보 교회에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할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죽기를 결정했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부족한 것을 채워 완전하게 빌립보 교회를 돌보기 때문이다(30절). 에바브라디도는 바울의 동역자로 빌립보 교회에서 충실하게 사역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자로, 바울의 충실한 제자로, 빌립보 교우들을 사랑했다.

빌립보 교우들도 에바브라디도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지지하며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부족한 문제에 대해서 바울의 지도를 따라서 완전한 교회로 나가길 시도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개교회주의는 성경적 교회관이 아니다. 교회는 서로 돕고 도움을 받고, 가르쳐주고 가르침을 받으며 함께 지지하며 성장해야 한다. 교회와 사역자가 도움을 받는 것은 기쁘고 정당한 것이고, 도움을 주는 것은 주의 것을 봉사하는 것 뿐이다.

5. 빌립보 교회의 사역자 에바브라디도는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선생을 신뢰하는 충성된 종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역의 모습일 것이다. 교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지만, 자기를 수련시키고 교회에 파송한 선생의 가르침과 교제로 교회를 사역했다. 그리고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선생께 의뢰했고, 든든한 신뢰관계에서 빌립보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며 굳건한 믿음 위에 기쁨에 기쁨을 더할 수 있었다.

6.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주의 복음으로 교회가 세워졌지만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겸손과 동역과 지혜를 주옵소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선생의 지혜와 권면을 주옵소서. 주께서 허락하시고 맺어주신 교사의 본과 지도를 따라서 신실하게 사역하겠나이다. 그래서 교회 한 믿음 한 마음 한 소망으로 굳건하게 하옵소서. 이러한 일을 위해서 교회 사역자를 세우심을 믿습니다. 주의 충성된 사역자로, 교회의 충성된 일군으로 교회를 바르게 세우며 정진할 수 있게 하옵소서. 교회의 사역자들이 신신한 사역의 교제가 있게 하옵시고, 사역자와 교우들이 복음의 바른 정진이 있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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