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어떤 기관에서 한국교회 세습의 행태를 보고한 것을 보았는데, 한국 교회에 전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 보고서는 교회 규모가 100명 이상 된 교회에서 발생한 세습을 면밀하게 조사한 것으로 보였다.

‘세습(世襲)’은 본래 ‘왕조를 계승하는 형태’를 칭한다. 그런데 누가 명명했는지 알 수 없지만, ‘교회 세습’이란 용어로 정착되었다.

장로교단들은 세습방지법안을 제정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예장통합교단은 2013년에 교회세습방지법안을 제정했었고, 2017년 총회에 양심의 자유와 공평성에 위배되기 때문에 폐기 헌의가 상정되었지만 결국 기각시켰다. 세습방지법은 담임목사의 자녀 혹은 사위 등은 해당 교회에 부임할 수 없는 금지 조항이기 때문에, 공평성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장합동, 예장고신 등에서는 제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장통합 측에서는 왜 분명하게 원리가 위배되는 세습방지법안 폐지 헌의를 기각시켰는가? 그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법과 상식에서 상식이 우선한다. 상식보다 더 합리적이어야 할 법안이,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은 법문(法文)이나 법을 집행하는 주체 등에 큰 결격 사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세습’이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 교회와 사회에서 횡횡하는 것 자체를 불식시켜야 한다. 담임목사의 아들이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것은 교회와 본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세습이란 상상할 수 없는 단어가 부착된 이유는 무엇인가? 담임목사가 제왕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목사와 왕은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순결하고 고결해야 할 직임인 목사와 사회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조작해야 하는 왕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필자는 세습을 반대하는 단체에서 100명 수준의 교회까지 조사한 모습을 보며 웃었다. 100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도 제왕적 모습이 있을까?하는 상상 때문이었다. 100명 이하 시골 교회 등에서 교회를 세습하는 경우의 수까지 모두 조사했더라면 좀 더 체계적인 조사가 되었을 것이다.

‘제왕적 담임목사’를 용인한 교회는 그 자체로 세습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분란을 맞이할 것이다. 세습이 문제가 아니라, 제왕적 담임목사를 용인한 자체가 문제다. 제왕적 담임목사가 왜 자기 아들, 사위를 후임으로 세우지 않겠는가? 겸손한 담임목사는 오직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할 것이고, 상식에 위배되는 사안에 대해서 교우들이 허용해도 극하게 만류할 것이다. 그것이 상식 위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나의 아들이 목사후보생으로 신학을 연마하고 있다. 나는 나의 아들이 나의 뒤를 이어 기쁘게 나의 사역지를 계승하기를 바란다. 교우들이 허락해야 하고, 본인도 허락해야 하는 ‘AND 조건’이다. 나는 나의 사역지가 제2의 인생이고 나의 땀이고 나의 생명이다.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여기에서 떠나고 싶지 않고 끝까지 같이 하고 싶다. 나는 목사정년제도부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70세에 강건한 사역자가 많고, 50세에도 나약해진 사역자들이 많다. 그것을 노회와 교회가 조정해서 효과적으로 배치할 수 있어야 하는데, 행정적으로 결정된 정년제도만을 의존하고 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법률로 강제하는 것은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가장 존귀한 모습과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에는 어떤 제약을 두지 않으며, 복음의 사람은 강제가 아닌 스스로 제약을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

교회 세습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은 충격적이다. 교회 세습이 아니라 권력과 재산의 세습이기 때문에 문제이다. 목회 사역의 계승이 아니라, 권력과 재산을 세습하기 때문에 문제다. 지나치게 대형화된 교회는 이미 권력과 부의 상징이 되었다.

필자는 3% 이하의 대형교회 목사들로 97%의 목사를 평가하지 않도록 촉구한다. 눈에 보이는 3%가 한국 교회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3%가 한국 교회이다. 아직도 지하실에서 산골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교회를 사랑하며 세우는 한국교회 사역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늘이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의 터를 굳게 세우려고 정진한다. 한 대형교회의 세습으로 한국교회가 흔들리는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3%의 믿음이 오뚝이처럼 굳게 서게 할 것이다.

탐욕의 사람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주님의 사람은 가라지 비유에서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다(마 13:24-30). 공적인 노회와 교회가 허락하고, 노회가 임직한 목사가 허락한 사안이다. 대통령처럼 국민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서 목사가 되는 사안이다. 가장 무서운 벌이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가?(롬 1:18-32). 반대 의사는 명료하게 피력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그 잘못된 결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침묵은 중간이 아니라 부정에 동조하는 것이다. 나의 영역에서 나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이고 지도자의 행동 매뉴얼이다. 결단의 때가 오면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그리고 자기 행동과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가면 된다. 자기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에 무심하거나 방관자가 되지 말라.

필자는 한국교회 목사와 함께 성도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종교개혁의 횃불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판단 주체가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음을 밝혔다. 성도는 속박하는 제왕적 행태의 노예의지에서 벗어나 자유자로 판단해야 한다. 교회의 주인은 주 예수이고, 교회의 재산권은 모든 성도의 것이다. 목사는 교회 총유권이 없는 총유권자를 조정하고 대행하는 자(종교업무행사권)이지 주재자가 아니다. 영적으로 돌보는 양을 목양(牧養)하고 감독(監督)하지 않는다. 감독은 목사들을 감독(監督)하지 성도들은 감독할 수 없다. 철저하게 개혁한 장로교회는 치리권을 목사가 단독적으로 행할 수 없게 확립하며, 장로의 보고 후에 협력하여 행사하도록 했다. 성경과 교회법 그리고 사회법에서 확정한 자기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권리포기이고 자기 결정에는 합당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어떤 세파가 휘몰아칠지라도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실한 종들은 정진하고 있다. 400년의 암흑에서도 안나 선지자, 시므온 등은 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예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안나와 시므온도 배려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름없은 종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주와 재림에 관심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대형 이슈에서 눈을 떼서 무릎을 꿇고 사역하는 신실한 종들을 바라보라. 대형 이슈의 현장에서 벗어나 이름없는 사역자의 사역에 헌신하라. 빨간 카펫 위가 아닌 충성하는 사역지에서 주의 오심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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