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편(詩篇, Psalms, 테힐림-찬양의 책들, 살모이-현악기에 맞추어 부른 노래)은 시가서(5권) 중 두 번째이고, 타나크에서는 성문서(케투빔) 중 시서에(시편, 잠언, 욥기) 속해 있다.

2. 시편의 저자는 ‘다윗’으로 이해될 정도로 다윗의 작품이 많다. 시편이 150편으로 구성되었는데, 116편이 표제를 갖고 있고, 73편이 다윗의 시이다. 저자 미상의 시(詩)가 50편이 있는데, 그 중에 다윗이 지은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시편에서 ‘다윗’을 상상해도 무방하다. 시편에서 다윗을 시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로 생각하는 것이 유익하다.

시편은 다윗이 73편, 고라의 자손이 10편, 아삽 12편, 솔로몬 2편, 헤만 1편, 에단 1편, 모세 1편, 무명 50편이다.

시편 150편 묶음과 배열은 70인경에서 거의 체계화되었다. 시편은 150편 5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1-41편), 제2권(42-72편), 제3권(73-89편), 제4권(90-106편), 제5권(107-150편)이다. 1-3권(1-89편)은 다윗의 시로 탄식시들이 많다. 4권(90-106편)과 5권(107-150편)은 긍정적인 내용, 성전에 올라가는 시는 공동체적이고 지파동맹을 사모하는 시들이다. 궁켈(H. Gunkel)은 시편을 찬송시, 탄식시, 제왕시, 감사시, 지혜시 등으로 분류했다. 많은 시편 연구자들이 각자가 이해한 방식으로 시편을 분류한다.

3. 교회 사역자들은 시편을 굉장히 사랑하고 연구했다. 기독교에서는 시편을 기독론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해석에서 가장 큰 가치 중 하나였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성경해석 방법은 알레고리적(우화적) 이었고, 안디옥 학파는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이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시대에는 시편에서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통해서 기독론적 해석을 밝히려고 했다. 칼빈은 시편에서 본문을 떠나서 과도하게 진행하는 기독론적 해석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다. 19세기 자유주의가 만연할 때 구약성경 해석을 주도했던 궁켈(H. Gunkel)은 시편을 삶의 정황(Sitz im Leben)으로 분류하며, 양식비평을 창안했다. 궁켈의 해석방법을 신약으로 도입시킨 사람이 루돌프 불트만이다. 양식 배후에 있는 삶의 정황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탄식, 회의, 좌절, 소망, 감사, 찬양의 구조로 분석한 경우도 있다(윤형, “시편의 구조와 흐름”). 시편을 문학 구조로 보면 메시아 의미를 찾기 어렵다. 시편을 해석하려는 연구자는, 시편을 계시 문서로 볼 것인지, 문학 장르로 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시편을 계시 문서, 즉 예수 믿음을 유발시키고 증진시키는 문서로 본다.

4. 다윗은 왕이며 선지자였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지만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신학적인 이유이다. 다윗의 후손 솔로몬의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은 메시아를 지시하고 상징한다. 다윗은 현재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몰두한 것이 아니라, 고난의 궁극적인 문제 해결이 메시아의 도래라는 것을 믿고 전한 선지자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신비 중 하나이다.

인생을 고난을 수용하거나 인내하며 나가는 훈련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에서 믿음의 주를 바로 보며 찬송하며, 오직 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 고난이 지나면 더 좋은 상황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 기뻐하고 고난이 사라지면 기뻐한다. 인간사(人間事)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이지만, 기독-인간(基督-人間事)는 찬미 속에 거함이다. 다윗이 매시아를 고대하며 찬송했고, 다윗의 후손인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를 믿으며 찬송한다.

5. 천재(天才)는 음악성이 있다. 그래서 간혹 천재들은 자기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음악을 시연하는 경우가 있다. 음악은 학문의 최고봉에 위치하기도 한다. 세종대왕은 조선건국을 칭송할 수 있는 음악을 정비했다. 그러나 음악으로 우상화를 위한 작품으로 사용되는 것이 부당하다. 음악은 운율(韻律)과 화음(和音)으로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시편 문장으로는 화음을 상상하기 어렵다. 운율은 번역된 성경에서 구현하기 어렵다. 운율과 화음 속으로 다니는 메시아 찬송과 믿음을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시편에서 찬송 속에 거하는 주님을 상상할 수 있다(시편 22편).

6. 시편에서는 율법을 사랑하는 모습(Torah Psalm)이 등장한다(시편 1, 19, 119 편 등).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율법을 사랑하고, 꿀송이와 같다고 고백하는 것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율법은 백성을 정죄하는 기능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게 하는 길잡이이다. 하나님께 가야할 율법을 인간이 구원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그럼에도 율법에 정죄 기능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지 않을 때 책망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은 발등상 위에 등불이다(시 119:105).

7. 시편에는 다윗이 고난 중에 저술한 시들이 많다. 그런데 다윗이 고난이 없을 때 지은 시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고난이 복일까? 평안이 복일까? 우리는 평안할 때 주를 찬송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고난 중에 찬송하지 못한 사람은 평안 중에도 찬송하지 못한다. 다윗처럼 고난 중에 찬송하고, 평안 중에 범죄할 수 있다. 고난 중에 생의 갈림길의 갈등에서 주를 신뢰하려는 다윗의 몸부림은 생의 깊음과 믿음의 신비를 잘 드러낸다. 저주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백을 한다(시편 35, 69, 109, 137편). 가장 무서운 저주시는 시편 137편이다. 인간의 처참과 잔혹 그리고 생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래서 생은 아름답고, 잔혹해도 생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8. 필자는 시편을 읽으면 1편 율법을 사랑(주야로 묵상)하는 의인의 삶이 영생과 성전을 향하는 것이며, 형제와 함께 축복하며 찬송하는 150편으로 요약한다.

9. (참고) 찬송과 기도는 다르다. 찬송을 “곡조있는 기도”라는 경우가 있는데, 바른 제시가 아니다. 찬송은 가사와 곡조가 있고, 반복 가능하다. 기도는 일회성 문장을 원칙으로 한다. 찬송은 개인과 공통체가 함께할 수 있지만, 기도는 개인이나 공적으로도 개인으로 한다. ‘합심기도’라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한 제목을 놓고 함께 힘껏 기도하는 것을 합심기도라고 한다. 그러나 찬송은 공동체가 한 가사를 동일한 곡조로 부르며, 거기에 화음까지 넣어 찬양한다. 군대에서 사기와 일체감을 높이기 위해서 군가(軍歌)를 부르는 것처럼, 찬송가는 하나님을 높임에 일심을 갖으며 형제애를 이룬다. 찬송과 기도는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찬송으로 하나님을 초청한다는 개념을 갖는데,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다. 찬송은 초청행위가 아니라 다가가는 행위이다. 기도는 다가가는 행위가 아니라 보내는 행위이다. 찬송과 기도가 같거나 유사하다면, 예배에 찬송과 기도를 교차를 반복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기도와 묵상이 깊어질 때 찬송으로 옮겨갈 수 있다. 개인찬송과 공적찬송은 다르다. 개인찬송이 공적찬송으로 자리 잡으면 공동체가 참여해서 공예배에서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다. 개인의 소원을 곡조로 읊조리는 것은 오히려 신성모독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전능한 하나님께 아뢰는데, 읊조리면서 보고할 수 있을까? 울며 탄식하며 외치는 것도 외람(猥濫)되는데......

10. (참고) ‘새노래’(시편 96편)는 신곡(新曲)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은 심령, 새사람이 하는 노래이다. “새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구절을 근거로 신곡으로 노래해야 한다고 노력하고 강조하는 경우를 보았다. 새노래와 새사람, 그리스도인이 동일하다(고후 5:17, 엡 5:16-21). 신곡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부르는 노래를 여호와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부르는 노래를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 자녀됨을 힘써야지, 신곡을 창출하려고 힘쓰는 것은 부당하다. 이미 제정된 계시 문장인 시편으로 노래해도 너무나 완전하고 아름답고 유익하다. 계시 문장을 전달하는 곡조를 조성하는 것도 큰 관건이다. 칼빈은 시편 찬송을 체계화시켰고, 루터는 민속 음조로 찬송을 구성했다. 필자는 한국 교회 음악은 미국 부흥사 무디(Moody)와 생키(Sankey)의 음악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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