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로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합니까? 혹시 우리가 진정한 설교를 듣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한 때는 저도 극동방송 애청자였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거의 듣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못 듣고 있겠다가 더 맞는 말입니다. 차라리 제 마음이 높아져서라면 좋겠지만, 아무리 겸손히 귀를 열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설교가 많습니다. 오늘은 제가 경험한 설교 가운데서 분별하고 지양해야 할 유형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해석이 없는 설교

가장 먼저는 해석이 없는 설교입니다. 설교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행위입니다. 설교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구원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사람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차용하기만 하고 본문과 씨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위하여 성경을 이용하기만 합니다. 이런 설교에는 진정한 능력이 없습니다.

2. 번영신학에 물든 설교

가장 많고 가장 심각하게 잘못된 설교 유형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 우월주의가 팽배하고 기복적인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선포하면서도, 세상에서 잘되기만을 바랍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일도 아닙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과 상담 중에 들은 말입니다. 이사를 하여 저희 교회로 출석하게 된 친구인데, 직전 교회에서는 좋은 대학가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번영에 물든 설교는 사람들을 분주하게 만들고, 탐심과 정욕에 빠지게 만들며 결국에는 그들을 그리스도 밖으로 밀어냅니다.

3.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설교

한국 교회 설교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교훈이 뭐겠습니까? 아마 주일을 지키라든지, 십일조를 하라든지, 혹은 교회에서 봉사하라든지 그런 내용들입니다. 이런 설교에 열매는 사람들을 종교적 규범에 얽매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규범을 잘 지키면 의로운 자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신앙에 있어서 열등한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맹목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규범을 지키게 하면,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정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학(계시적 의미)이 중요한데, 한국교회 설교에는 신학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4. 도덕적인 설교

도덕적인 설교가 무엇이 문제인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실천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누구나 할 법한 말들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화해해라. 섬겨라. 희생해라. 인내해라. 물론 이런 교훈들은 그리스도인의 주된 덕목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도들에게 무거운 멍에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덕 선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높은 윤리수준을 요구받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어야지 출발점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법 없이도 사는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지, 허구한 날 서당에서처럼 ‘도덕을 조장 받아서는’ 결코 진정한 변화를 맛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5. 공로사상에 물든 설교

은근히 위험한 유형 중의 하나가 성도들을 공로사상에 물들게 하는 설교입니다. 사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는 것이 성경의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큰 영광과 많은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익한 종일뿐이고, 다만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 결코 주고받는 거래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헌납하도록 강요받습니다. 물질이든 시간이든 봉사든 아무튼 계속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을 못 받을 줄 압니다. 그리고 낸 만큼 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 드려 갚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은혜를 주셨기에 우리가 행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6. 잘못된 신본주의 설교

인본주의에 반대는 신본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치 독재자처럼 치부합니다. 하나님을 오해해도 단단히 크게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사 자신이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성도들의 헌신을 종용합니다. 높은 곳에 앉아서 채찍을 휘두르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지만,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아 지셨고, 우리에게로 내려 오셨으며, 죽으시기까지 그분의 사랑을 보이셨고, 오래 인내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하지 못하는 설교는 사람들의 영혼에 울리지 않습니다.

7. 이원론적인 설교

세상과 교회 혹은 세상과 하나님을 구분 짓는 설교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세상 혹은 육체를 말할 때는 ‘하나님적이지 않은’ 혹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시지 결코 세상과 대립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모든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출현되었고 회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함께 구원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샤머니즘적으로 변질된 것도, 어쩌면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설교 때문일 수 있습니다.

8. 현장이 유실 된 설교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설교의 유형들이 넘쳐나다 보니 한국교회의 설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현장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만 열심을 내지, 삶의 열매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등지고 살아갑니다.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연약합니다. 물론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고지론’이 아닙니다. 높은 곳에 올라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해도 기품을 잃지 않고, 없는 중에 나누며, 초라함 중에 풍성함을 누립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참 된 빛이며, 교회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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