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0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작년 연말부터 지금까지 에베소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오늘 본문까지 도달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도의 마음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과 은혜의 결과인지를 찬송과 기도에 담아 설명하면서 사도는 제발 교회가 이 구원의 은혜를 알고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2장으로 넘어오면 그 감격과 간절함의 여운이 사라질 만도 한데 오히려 그 강도가 더 증폭됩니다. 특별히 2:1-3절의 구원받기 이전의 비참한 인간의 상태에 대한 진술과 ‘그러나’로 시작되는 4절부터의 반전되는 내용은 이런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더욱 극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기 전의 자연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생각과 행동이 허망해져서 썩은 시체같이 더럽고 냄새나는 일들만 생각하고 그 더러운 일들을 하기 위해 땀 흘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 깊은 수렁과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욕심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에게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지옥심판과 불붙는 진노밖에 없습니다.

2장 4절은 ‘그러나’로 시작하여 이런 인생에게 반전이 일어났음을 알려줍니다. 앞의 본문은 절망과 비참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을 반전시키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긍휼히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긍휼로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서 짐승처럼 살고 본능대로 살고 욕심대로 살던 썩은 시체 같은 인간을 살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난 것은 우리 스스로 살아난 것도 아니고 살아 날만한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넘치는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나기 전에 우리는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자기욕심을 채우며 세상 풍속을 좇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좋은 머리와 몸으로 오직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만 행하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돈을 왕창 벌어가지고 좀 더 재미있게 살아보나? 어떻게 하면 남을 좀 이용해 먹을 수 있나? 좀 더 즐기고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만 생각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문제였고 사는 것 자체가 사고이고 불행이며 비참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이 별로 잘못된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한 두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부 그렇게 사니까요.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비참한 상태인지 잘 몰랐습니다. 원래부터 그랬고 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니까요. 이방인도 그랬고 유대인도 그랬습니다. 너희도 그랬고 우리도 그랬습니다.

이런 인생을 보면 불쌍히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길 가치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길 책임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의 가장 귀중한 독생자를 희생시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풍성한 긍휼이라는 말이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말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처지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너무 가슴 아파하십니다. 인간이 저렇게 살아갈 존재가 아닌데, 원래 내가 저들을 저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다가 저렇게 되었는가? 저들은 존귀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나를 닮은 형상으로 지어져 나의 사랑 안에서 나와 교제하며 생명 가운데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다가 이성 없는 짐승처럼 살아가게 되었는가? 마음이 아파 견디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은 이런 우리를 그저 불쌍히 보시고 끝나는 긍휼이 아닙니다. 그분의 긍휼은 마침내 자신의 사랑을 발동시키는 풍성한 긍휼입니다. 그 사랑으로 죽어 있는 우리를 살리고 회복시키고 존귀한 삶으로 일으켜 세우시는 긍휼입니다. 도저히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살려낼 만한 이유가 없지만 불쌍해서,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희생하신 것이 긍휼에 풍성하신 사랑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크신 사랑을 발동해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와 허물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에게 인간의 모든 죄를 다 덮어씌우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그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큰 사랑과 그리스도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냥 은혜라고 말하고 그냥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큰 사랑과 은혜라는 것이죠.

놀라운 것은 이 풍성한 은혜와 긍휼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너무 풍성하지만 그 풍성한 긍휼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들에게만 전달되고 적용되는 제한적인 풍성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적용됩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되어 있는지 우리는 다 모르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그 긍휼이 그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천하에 예수 외에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큰 사랑과 그리스도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로 살아난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이라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7절이죠. 더 이상 예전처럼 살아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개망나니 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다시 살려놓았는데 다시과거로 돌아가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고 오는 세대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난 사람인가?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나를 살려내시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부르셨는가? 그것을 생각하고 거기에 걸 맞는 삶을 살도록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다시 자기를 위해 살고 세상 풍조를 좇으며 살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며 사는 것은 가장 비싼 고급 차를 자기 마음대로 타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차는 조심해서 타야 합니다. 누가 굉장히 비싼 차를 누가 모는데 제멋대로 운전하면서 여기 쿵하고 받고. 저기 긁히고, 앞에 찌그러지고 뒤에 들어가고 완전히 엉망으로 운전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이 더 가슴이 철렁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큰 사랑, 그리스도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로 살아난 성도의 삶은 비싼 차를 모는 것보다 더 귀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귀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인지는 에베소서를 읽어가면서 차차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자랑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그 진리를 배워 남은 생을 그렇게 살도록 은혜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