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6일 부산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박홍섭 목사(부산 한우리교회,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엡2:5-10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함축적이고 강렬하게 설명하고 있는 구절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구절 안에 은혜라는 단어가 3번, 간접적인 의미인 선물까지 포함하면 4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린 것이 은혜라고 했고 7절에는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그냥 은혜가 아니고 지극히 풍성한 은혜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8절에 오면 다시 구원 얻는 믿음 자체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라고 재차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혜가 단순히 거저주시는 선물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은혜는 값없이 그저 주시는 호의가 맞지만 그 배후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자기희생과 지불하신 대가가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은혜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는 가벼운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청난 것이고 말로 형언하거나 설명이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이 은혜는 전혀 받아야 할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이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은혜이고 풍성한 은혜입니다. 결코 가볍게 취급하거나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거기 자식과 아내가 있습니다. 아빠와 남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건져야 합니다. 불타는 집으로 남편이 뛰어 들어와 아내를 구했는데 그때 아내가 남편에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평생 못 갚을 거예요. 그렇게 안합니다.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기적인 우리 인생에서 남편이 아내를 건지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감사하고 칭찬받을 일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안할 때 욕을 먹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겠죠.  

그러나 불타는 집에서 건져낸 사람이 아내와 자식이 아니고 원수였다면 그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원수를 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며 이상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바쳐서 건져낸다고 하면, 건져내는 것이 끝이 아니고 건져내어서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하고 아내와 자식처럼 사랑을 베푼다면 그야 말로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그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때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은혜이며 상상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이였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을 때 우리는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는 자체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는 것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마귀가 만들어놓은 세상풍조를 따르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하고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희생시켜서 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 놓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임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알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끝없이 감사하는 것이고 감사하는 것만큼 자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알면 자랑하지 못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부패한 인간의 속성 중에 가장 큰 특징이 남을 욕하는 것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서 교제하고 나눌 때 결국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자랑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식자랑, 남편자랑, 옷 자랑, 집 자랑, 차 자랑, 돈 자랑, 외모 자랑, 배운 것 자랑, 학위 자랑, 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이 자랑할 것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합니다. 인생은 자랑거리를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자랑할 때 그 자랑을 듣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감사가 아닙니다. 경쟁심과 시기심과 자신을 향한 좌절과 열등감입니다. 자랑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자랑은 부추겨야 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랑을 무익한 것이라고 했고 나아가 허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인생들은 서로 누가 더 많은 자랑거리를 확보하고 자랑하느냐로 다투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 자랑의 속성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 하면 구원을 받고 나서도 조심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조심하지만 어떤 때는 조심하는 것만큼 교묘하게 자랑합니다. 은혜라고 하면서 돈 자랑, 집 자랑, 차 자랑, 세상 것을 자랑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까지 자랑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자신의 기도를 자랑하고 구제를 자랑하고 봉사를 자랑하고 믿음을 자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만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끝없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에 관한 책을 펴내었는데 그 책에 자신은 하루에 8시간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읽어보니까 이것은 기도의 간증이 아니라 기도의 자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간증하는데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다 자기 신앙 좋은 것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한 것은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선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그 믿음이 마치 자신의 믿음인양 자랑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을 바로 알면 절대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표현 중 가장 믿음이 좋은 경우를 산을 옮기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바꾼다는 뜻이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알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산을 옮겼을 때 너무 놀라워합니다. 와.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믿음이 있을까? 그런데 사실 파고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믿음은 산하나 정도가 아니라 산 100개를 옮길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나머지 99개는 망설이고 불순종해서 못 옮긴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산을 옮긴 믿음이지만 사실은 겨우 하나를 믿음으로 순종해서 옮긴 것이고 나머지 99개는 믿음을 외면하고 불순종했습니다. 하나조차도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셔서 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유명한 어떤 설교자가 자신의 종교행위를 자랑하는 것은 창기의 자랑과 같다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입니다. 서울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할 때 사당동 총신 기숙사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내려서 교회까지 약 20분을 걸어가야 하는데 당시 그 길 좌우에 전부 술집과 방석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진한 화장을 하고 선정적인 옷을 입은 술집 아가씨들이 술을 팔고 자신들의 몸을 팔기 위해 미소를 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이 자랑하는 화려한 화장과 선정적인 옷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본다면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보란 듯이 드러내어 자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창기의 자랑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씩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성전에 가기도 전에 시간이 되면 시장어귀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종교행위를 자랑했는데 참으로 허탄한 자랑이고 부끄러운 창기의 자랑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기도를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볼 때는 8시간 기도하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나님이 들으실 때는 8시간이나 기도하는데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 거의 대부분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면 그것은 8시간이나 기도하는 그 사람의 대단한 열심 때문이 아니라 이런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부 시절에 어떤 대형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자기는 기도할 때 소나무 뿌리를 몇 개는 뽑았다고 하면서 소나무 하나도 못 뽑은 사람은 기도했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간절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산에는 메아리가 살도록 나무를 자꾸 심어야지 기도하면서 나무를 뽑으면 안 되죠. 나무 뽑으면서까지 매어 달리는 그 기도의 수준을 하나님이 들으실 때는 기가 찬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부끄러운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소나무를 뽑았는데 정작 그 기도는 유치찬란하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그 기도에 응답이 있는 것은 소나무를 뽑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자랑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태신앙,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2대를 믿고 3대를 믿고 그런 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100년 된 교회, 자랑할 수 없습니다. 믿은 지 3년 밖에 안 되는 사람도 그렇게 진실하고 뜨겁게 믿는데 3대를 믿는데도 그것밖에 못 믿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100년의 역사를 가졌는데 교회가 죽어 있다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자랑한다면 그게 바로 창기의 자랑인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그 은혜의 부요함과 풍성함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과 치르신 대가를 깨닫게 될 때 어떻게 됩니까? 자랑이 사라집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를 깨닫는 만큼 자랑이 줄어들고 자랑이 사라집니다. 은혜와 자랑은 정확히 반비례합니다. 자랑대신 감사가 나오고 찬양이 나옵니다. 자랑대신 칭찬이 나오고 격려가 나옵니다.

이것을 오늘 10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원문에는 10절 앞에 ‘가르’ 왜냐하면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자랑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굉장히 넓고 포괄적인 의미이지만 적어도 여기 본문에서는 자랑하지 않는 것과 연결해서 좁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랑을 멈추는 것, 그것이 선한 일의 출발입니다. 남을 욕하는 것을 멈추는 것, 다른 사람의 시기심이나 마음의 격발을 불러일으키는 무익하고 허탄한 자랑과 창기의 자랑을 스톱하는 것, 그것이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 그리스도인의 첫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업적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것마저도 자기를 자랑하는 포장이 될 수 있으니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것은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살리심을 받았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일으키심을 받았고 그리스도 때문에 하늘에 함께 앉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무익하고 허탄한 자랑을 멈추고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그의 십자가만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세우는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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