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개역성경, 출 4:21, 10:20, 11:10)

아들의 질문,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하심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매우 조심스러운 질문이다. 나 같으면 ‘왜’라고 도전적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나의 답은 “너는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냐?”였다.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됨을 행복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도 바울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바울처럼 살고 싶다는 복음찬송도 있다. 그럼 정말 당신은 바울처럼 살 것인가? 그렇다면 답한다면 즉각 집을 떠나야 하고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

아브람이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났지만, 롯의 가족과 318명의 정병을 소유한 집단이었다. 아브람의 기업을 이삭을 받았고,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장자권과 축복만 받고 밧단아람으로 도망가야 했다. 야곱은 75명의 가족을 구성했고,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형성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지만, 편애로 요셉을 잃었고 여호와만을 의지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 이삭은 에서를, 야곱은 요셉을 잃었다. 여호와만을 신뢰함으로 믿음을 정진했다. 그 인생이 행복했을까?

바울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이 세상 가치로 평가하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이 세상 가치로 행복을 가늠하는 자에게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여호와”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첫째, 이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고, 이 믿음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강퍅케 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에서 무한한 자비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죄를 조장하시지 않고 죄의 저자가 아니시다. 죄의 저자가 아니라는 부정적인 개념의 반대는 선하신 분이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하는 여호와”에서 죄인을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여호와를 향해서 강퍅한 마음을 가진 나를 향해서 오래 참으신 그 인내와 자비를 볼 수 있다면, 출애굽기에서 10가지 기적의 말씀보다 인내가 풍성한 여호와의 구원 경륜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인생이 자기 인생을 만족할 수 있을까? 나를 이렇게 만든 존재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기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종교와 철학을 능가한 지상에서 유일한 신적 존재일 것이다. 불만족스러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를 때는 부모님을 원망하고, 종교심이 발생할 때는 창조주를 원망한다.

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둘째, 바로의 강퍅게 하심은 ‘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바로는 스스로 왕이 된 자이다. 인간을 군림하는 왕은 필요 없다. 그런데 바로를 왕이다. 이미 그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왕이다. 이미 그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짓밟고 있었다. 왕에게 하나님은 자신 뿐이다. 당신은 왕(자유인)인가? 노예(종)인가? 사도 바울은 자기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자유자라고 외치고 있다.

왕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다. 그것이 신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왕이 아니라, 왕의 자녀이다.

시골에서 목회할 때 동네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네 이장님께서 너무나 많은 관심과 돌봄을 주셨다. 쌀, 과일, 채소, 행정적 도움까지 모든 것에 배려가 넘쳤다. 그럼에도 만나면 나에게 ‘하대’를 했다. 동네 교회이고, 동네 관할에 속한 기관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촌장(村長)’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를 강퍅케하시는 여호와에서는 왕이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왕의 자녀이다. 왕같은 제사장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어떤 왕에 대해서도 바로처럼 마음을 굽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왕이고 왕의 자녀이다. 죄인인 바로가 세상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설 수 있었던 것은 그 완고한 마음을 볼 수 있다. 성령훼방죄는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이다. 바로가 성령을 훼방하는 강퍅한 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강한 마음은 그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마음이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아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언하셨다.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자기 힘으로 강퍅한 세상왕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왕의 모략 앞에 선다. 스스로 왕된 세상왕과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 중 누구의 마음이 더 강할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육의 싸움이 아니라 어둠의 정사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왕을 주관하는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세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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