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 광주 망월동 주님의교회 목사. 크리스찬타임스, 한국성경연구원, 세움선교회, 크리스찬북뉴스

1. [빌 3:1-3. 육체의 힘으로는 절대 영(靈)의 일을 할 수 없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우들에게 다시 한 번 기뻐하라고 말한다(1절). 기쁨(喜樂)은 그리스도인에게 기본 행동 강령이다(살전 5:16-18).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뻐하는 모습을(빌 1장) 보이면서 기뻐하는 믿음의 방식을 소개했다. 바울이 감금된 상태와 시기질투를 받는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모범으로 빌립보 교우들에게 담대하게 기뻐할 것을 명령했다. 빌립보 교회가 한마음을 이루지 못하면서 갈등이 발생해서 기쁨이 사라졌는데, 바울은 기쁨이 사라지지 않도록 권면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기쁨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육체의 생각,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은 환란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기쁨이 있는 상태는 안전한 상태이다(1절).

성도들이 기쁨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것이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증진되도록 해야 한다. 기쁨이 크면 클수록 안전한 상태일 것이다. 성경의 특이점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을 받으면 더 화가 나거나 조롱을 받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한다. 그리스도인은 권위자가 기뻐하라고 명령할 때 겸손하게 순종해서 기쁨에 이를 수 있는 경건훈련이 되어야 한다.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자들은 모두 같은 말로 강조 표현을 위한 중복(의미중복)이다(2절). 교회가 시작 하자마자 거짓 가르침은 교회 안에 유입되었다(마 13:24-25).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속지 않도록 경계하도록 권면했다. 그리고 사도는 빌립보 교우들이 분별력을 갖도록 언제나 주께 기도했다(빌 1:10). 거짓 가르침을 교회에 허용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참고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하신 여호와) 거짓 가르침은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역설적인 기능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 땅에 존재하는 죄악(罪惡)은 쉽게 다룰 수 없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도록 지도했다(3절).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며, 그 믿음으로 겸손히 교우들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육체를 신뢰하면 자기를 자랑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예수를 자랑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자랑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는 교묘한 꼼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도와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할례당이다. 할례당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다(신 10:16, 30:6, 렘 4:4, 골 2:11-15).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고, 자기 육체의 모습을 배설물(3:8)로 선언했다. 육체를 신뢰하며 얻는 기쁨은 얼마나 교묘하고 잔인한가? 이런 기쁨은 성령으로 기뻐하는 즐거움과 전혀 다른 성격이다.

거짓 교사는 육체의 자랑을 감추기 위해서 경건의 모양을 사용한다. 그리고 경건한 자를 비웃은 기쁨을 누린다. 경건의 이름으로 경건한 자를 압박한다. 그리고 돈과 명예와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을 전념한다. 하늘의 보화로는 기뻐할 수 없고 오직 땅의 돈, 명예, 권세를 소유한 것을 목표와 기쁨으로 생각한다. 거짓 교사는 탐욕의 성취를 즐거워하며 겉으로 종교적 모양으로 포장한다.

2. [빌 3:4-9.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모형으로 바울]

교회에 잠입해서 교회를 훼방하는 유대주의 무리에 대항해서, 바울은 부득이하게 자기 육체를 제시했다. 비록 바울이 자기 육체의 이력을 제시하지만 오직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높여지고 영광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바울의 육체(이력서)는 당시 유대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4절). 바울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베냐민 지파로 왕족이다.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언약을 유지한 지파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를 사용할 수 있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만일 육체를 자랑하는 유대인들 중에서 바울(사울)만큼 유대인은 없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는데 가장 앞장 선 위인이었다(7절). 그것은 유대 사회가 인정할 정도로 유명했다. 사울은 스데반을 처결하는데 주도했다(행 7장). 그런 사울이 그리스도인,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감당했다(4-6절).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모든 것을 해(害)롭게 여겼다(8절). 이전 유대교에 대한 지식을 버리고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추구했다(8절). 전자는 배설물과 같고 후자는 가장 고상한 것이다. 자신은 유대교에게 원수가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를 얻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이전에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 버렸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의(義)를 가졌다고 선언하며, 그 의의 근원을 율법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받은 것으로 고백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난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의도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다(9절). ‘의’(δικαιοσύνη)는 히브리어 두 단어(미쉬파트와 체타카)에서 헬라어 한 단어로 옮겨졌는데, 영어에서 다시 right와 just로 번역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공의’와 ‘정의’로 구분하던 것을 ‘의’로 묶어서 사용한다. ‘의’ 개념을 명확하게 세우는 것은 쉽지 않다.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할 때 의는 just로 사용하는데, 이신득의(以信得義, righteousness by faith)에서 의는 right로 사용하는 것을 제안해 본다. right는 내면적이고, just는 외면적인 것으로 분류해보고, 공의는 바르게 정의는 크게 하는 것으로 제안한다. 공명정대(公明正大). 서양에서 just는 ‘분배정의’로 축약되고, 동양에서 정의는 ‘대동(大同)’으로 축약된다.

3. [빌 3:10-16.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함]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표어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도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고백했다(10절).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은 어떤 신비한 종교 형태가 아닌 고난에 참여함, 자기부정(십자가를 짊)이다. 억지로 진 십자가라는 표현인데, 간혹 정말 억지로 진 십자가로 억지로 교회 봉사를 하는 것으로 대입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고난에 참여함은 성령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능력으로 기쁨과 감사가 동반되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기간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부활의 권능을 아는 것으로, 곧 부활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지식이라고 제시했다. 억지론 진 십자가는 훈련의 필연성으로 연결시켜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의지를 굽게하는 방식의 강제는 부당한 방식이다.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은 성품을 본받는 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본받는 것이다. 빌 2장에서는 성육신의 신비를 빌 3장에서는 십자가의 신비를 제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사역의 마지막 여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가 구원을 이미 얻었다고 확신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는 상태로 제시했다(12절). 빌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과 같은 맥락이다. 사도께서 이렇게 말한다면 누가 자신이 구원을 이루었다고 자고(自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십자가 앞에 선 그리스도인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구원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이후로 자기가 성취한 모든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앞으로 자신이 잡아야 할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간 것은 로마가 아니라, 서바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성령의 사람은 생명이 끊어지기까지 목표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뒤의 일을 잊어버릴 수가 있다. 그런데 앞의 목표가 사라지면 당연히 뒤의 일이 생각난다. 앞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것은 죽음만 보인다는 것이다. 죽음은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에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죽음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뒤에 일을 붙잡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과거의 업적이 사라지고 미래의 목표가 생겨난다. 그래서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간다고 고백한다(14절). ‘달려간다(press, διώκω)’는 12절과 14절에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감옥에서 거침없이 믿음의 정진을 계속한다고 외치고 있다. 믿음의 정진은 어떤 것도 가둘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부름의 상(賞)”은 상급으로 바로 연결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온전히 이루었다는 생각을 경계시켰다(14절). ‘다 이루었다’는 선언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고 가면 ‘다 이루었다’는 말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께서 달려갈 길이 밝히 보일 것이다. 십자가를 진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준 그 길을 그대로 행하면 된다(16절).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능동 표현을 하였다. 십자가를 능동적으로 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의 은혜,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이다.

4. [빌 3:17-21. 하늘의 시민]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다(17절). 빌립보 교우들이 사도를 본받으면, 바른 복음 사역자와 성도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17절). 참 교사나 거짓 교사나 모두가 예수를 전하기 때문에 깨어있지 않으면 육의 본성에 부합되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에 미혹될 수 밖에 없다. 거짓 교사는 예수 이름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도록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시 한 번 거짓 교사, 십자가의 원수의 행동에 대해서 경계하며 권면한다(18절). 사도의 심정은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으로 빌립보 교우들을 권면했다. 이는 수 없이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의 연약함이다. 육의 본성이 얼마나 끈질긴가? 사도 바울의 권면에 순종해야 거짓 교사의 유혹과 미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필자는 거짓 교사에 유혹되지 않는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 참 교사의 권위를 존경하고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을 제안한다.

거짓 교사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이다. 그들은 멸망당할 자들이며 먹는 것을 위해서 즉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사는 자들이다. 그들의 영광은 땅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땅에서 멸망될, 땅에서만 필요한 배, 이 땅에서만 유효한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무리 예수의 이름을 말해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이니 따르지 않아야 한다. 성경이 마치 바른 목사를 분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수의 영,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 복음을 양식으로 산다. 그 거짓 양식을 즐거워하는 것은 곧 중독(中毒)되어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중독에도 중독하게 하는 성분이 주는 즐거움은 있지만 결국은 멸망된다.

사도는 독특하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20절). 서신에서는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성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들의 시민권(소속)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이다(20절).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땅에서 소수자(minority)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교회에 거짓 교사를 파견하여 진멸하려 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받은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20절). 세상을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견딜 수도 없다. 주의 힘으로 견디며 주의 오심으로 세상을 이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성도의 잎에는 ‘마라나타’를 읊조리며 기다린다. 그날이 오면 주께서 만물을 실제적으로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것이다(21절). 그리고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21절).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께서 종의 형체를 가져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의 형체를 우리에게 보여주셔 소망을 갖게 하셨다. 비록 흙으로 창조된 인간일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은 영광의 형체로 변하게 하실 수 있다.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파송 재림에서 영광의 형체로 변형시키신다.

5.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교회를 주 하나님의 피로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악한 자들이 뿌린 거짓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 안에서 기쁨으로 우리의 기쁨을 사라지게 하는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게 하옵소서. 육의 즐거움을 탐닉하지 않도록 인도하옵소서. 우리의 푯대를 앞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진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땅의 마지막 날에 영광의 형체로 변화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우리에게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정진하여 주의 재림의 날에 영광의 몸의 형체를 입게하여 영원히 주를 찬양하게 하옵소서. 이 땅에 거짓과 땅의 영광과 권세가 가득하오나, 오직 주만 믿으며 바라보겠나이다. 우리에게 눈동자처럼 보호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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